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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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연구소] 기해박해 180주년 댓글 이벤트 - 박희순 루치아 편

2019-09-23 ~ 2019-09-29

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19-09-23 ㅣ No.10346

기해박해 180주년 댓글 이벤트 - 박희순 루치아 편

 

 

  기해박해는 4대 박해 중 신유박해 이후에 전국적 규모로 일어난 두번째 박해다.

  1839년 4월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공식 반포되면서 대대적인 천주교 신자 탄압이 시작됐다.

  전국적인 박해는 184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이 때문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ㆍ샤스탕 신부 등 조선 교회 핵심 지도자들이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

 

 

※ 네번째 편: 박희순 루치아(1801-1839년) 

 

기해박해 180주년을 맞아 굿뉴스는 한국교회사연구소와 함께 10월 31일까지 매주 한분의 성인을 소개하고 그분의 삶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아래 링크에서 자세한 성인의 내용을 확인하세요.

 

 

   ☞ 가톨릭성인 > 굿뉴스 연재 기해박해 순교자 약전, 박희순 루치아 편

 

    궁녀가 되다

   박희순 루치아(1801~1839)는 기해박해 때의 동정 순교자로서 성녀 박큰아기 마리아(1786~1839)의 동생이다.

   그녀는 1801년 서울 부잣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미모와 재주가 출중하였다. 일찍 모친을 여의고 15세가 되기도 전에 궁녀로 선발되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에 따르면, 순조(純祖)의 청을 거절하고 동정을 지켜 궁 안에 그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녀는 영민하여 순조의 딸 복온공주(福溫公主)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복온공주가 혼인한 후에는 공주의 거처인 창녕위궁에서 생활하였다. 이후 순조의 비 순원왕후(1789~1857)에게 발탁되어 상궁의 자리에 올라 선왕의 위패를 모시는 일을 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되다

 

   박희순이 30세가 되었을 때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신자가 되어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곧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였으나 궁녀의 신분으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궁을 나왔다. 부친이 외교인으로 천주교를 싫어하여 언니 박큰아기 마리아(1786~1839)와 남대문 밖 조카(박 프란치스코)의 집에 머무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녀는 조카의 가족을 모두 입교시키고, 교리를 온전히 실천하기 위해 힘썼으며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을 귀한 보물로 여기며 밤낮으로 주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살았다. 자주 기도와 묵상에 열중하였고 거친 의복을 입으며 극기에 힘쓰면서 예수님의 수난을 회상하였다. 

 

   기해박해가 일어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박해가 심해지자 가족 전체가 전경협 아가다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4월 15일 포졸들이 이를 알아채고 전경협의 집을 습격하여 박희순, 조카 박 프란치스코 가족, 전경협 등이 체포되었다. 포도청으로 끌려간 박희순에게 포도대장은 “일반 평민들보다 신분이 높은데도 너는 어찌하여 그 천한 종교를 믿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우리 천주교는 조금도 천한 것이 아니며,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신 천주님을 섬기는 종교인데 천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마땅히 그분을 찬미하고 흠숭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포도대장이 “그 사교를 버리고 도당들의 이름과 주소를 대라”고 했을 때 박희순은 “내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신 천주님을 저는 배반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천주님께서 이웃을 해치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신자들의 이름을 댈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박희순은 혹독한 형벌에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며, 다른 교우들을 권면하는 데 노력하였다.

 

   성녀가 되다

   박희순은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 피가 흐르고 뼈가 드러나 골수가 흘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에 그리고 성모 마리아님이 마음에 받으신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이 시간까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으나 인제야 그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혹독한 형벌을 받은 후 2, 3일이 지나면 박희순의 상처는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박희순은 한 달여를 형조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옥에 갇힌 교우들에게 서한을 돌려 인내하고 신앙을 굳게 지키자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다른 8명의 교우와 함께 사형 판결을 받은 후, 5월 24일(음력 4월 1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에 3일간 버려져 있다가 교우들이 거두어 앵베르 주교가 미리 사놓은 매장지에 묻혔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박희순 루치아는 형조에서 형언(形言)하기 어려운 고문을 받았다. 그럼에도 2, 3일이 지나면 고문의 상처가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그녀의 신앙이 굳건했기에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9월 순교자 성월을 보내며 박희순 루치아를 비롯한 기해박해 순교자들을 한분 한분 기억하여 우리의 신앙도 키워갔으면 좋겠다.

 

   [자료 제공 : 한국교회사연구소]

 

 

 

 ※ 참고자료: 가톨릭 성인 > 박희순 루치아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 가운데 추첨하여 한주에 10명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교회와 역사>를 3개월분(10월~12월) 무료로 우송해 드립니다.

또한, 한 달에 다섯 분을 추첨하여 <기해병오 박해 순교자 증언록> 영인본 1세트(15만원 상당)를 보내드립니다. 

 

* 참여방법: 위 성인의 글을 읽고 묵상글을 적어주세요.

* 이벤트 기간: 9월2일(월)~11월 3일(일)

* 이벤트상품: 한주에 10명 - 월간지 <교회와 역사>,

                      한달에 5명 - <기해병오 박해 순교자 증언록> 영인본 1세트(15만원 상당)

* 당첨자 발표: 9월24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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