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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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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위대한 침묵[영화비평-필립 그로닝 감독]-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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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실 [jhs714] 쪽지 캡슐

2010-01-14 ㅣ No.406469

 

   
 
최근에 엄률관상수도원의 사계를 담은 영화가

상영되었다.[위대한 침묵]. 선재아트센터 등

몇 개 안 되는 상영관에서 볼 수 있으나, 연일 매

진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12월 17일 오전에 영화를 보았는데, 추운 날

씨에도 아랑곳 없이 인파가 밀렸다.

이날은 우연히도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26년

동안 관상생활을 했던 토마스 머튼이 영원한 대

지에 묻힌 날이다.

 

 

 

'오직 하느님만', 침묵 속에서 들리는 부드러운 소리

[위대한 침묵]은 영화치곤 상당히 긴 침묵을 요구했다. 162분짜리 영화였다.

영화는 수도원의 일상에 관해 어찌보면 지루하달 수 있는 장면을 반복해서 연출했다.

음성은 눈이 먼 노수도사의 읊조림 같은 발언이 전부였으며, 사람의 언어가 섞여들지 않

은 음향이 들릴 뿐이었다. 삐걱이는 문소리, 대야가 용도를 마친 수도사의 뒷끝에서 자

리잡아가는 소리, 종소리, 그리고 그레고리안 성가. 수도사들은 방에서 면벽 한 채 끊임

없이 기도에 열중한다.  아니 집중(集中)한다.

마치 틈새를 노리는 악마가 기도 사이에 끼어들기라도 할까봐 두려운 듯이. 이 영화는

해발 1천 3백 미터 알프스의 깊은 계곡에 자리잡은 프랑스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Le Grande Chartreuse)에 거주하는 카르투시안 수도사들의 일상을 그렸다.

이들은 침묵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도록 관객을 이끈다.

필립 그로닝 감독은 1984년에 이 수도원에 촬영 요청을 했다가 거부당하고, 역시 침묵

같은 19년을 지나서야 허가를 받아 6개월 동안 수도원 안에 머물며 영상을 담았다.


그는 수도사들처럼 독방에 머물며 혼자서 촬영하고 녹음하고 편집했다.

따라서 수도사들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인공조명이나 인공음향 등을 사용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수도사들이 행하는 설거지와 청소, 정원일, 식사준비하는 모습들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수도사들의 침묵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아마도 이들이 침묵을 통해 하느

님께로 다가가는 여정에 오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붙어 있다는 말처럼 '오직 하느님만' 생각하는 까닭일 것이다.

이 영화는 오프닝 자막을 통해 수도사들이 이 삶을 통해 무엇을 바라는지

잔잔히 알려준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

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은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

다"(1열왕 19,11-13)

   
 

전통적인 엄률봉쇄수도원, 샤르트뢰즈 카르투시안 수도원

한 자료에 따르면, 이 카르투시안 수도원은 1081년 성 브르노가 창설했다.

사방이 벽으로 갇힌 곳에서 바깥 세상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매일 한 끼만

의 식사로 소재를 지키며, 세상 모든 인간적 재미와 흥미를 떠난 채 철저한 고독 속에서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누리는 이곳 수도승들이 세상을 떠나 홀로 선 것은 세상을

어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의 특별한 성소로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수도원은 세상의 변화에도 여전히 지금까지 창립 초기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했을 때 거의 모든 수도회가 더 이상 엄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모두 완화된 규칙을 채택했으며, 흑사병이 지나간 후에도 원래의 엄률로 돌아오

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카르투시안회만이 단 한번의 회칙 개정도 없이 고유의 엄률을

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이는 카르투시안 수도회의 독특한 행정체제 덕분이라고 한다.

이는 일종의 감시제도인데, 중앙위원회에서 구성된 일단의 봉쇄사제들이 전 유럽 카르

투시안 수도원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몇 달간 생활하며 각 수도원(분원)에서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변화의 움직임을 감찰한다.

프랑스의 역사만 봐도 무수한 전쟁, 전염병, 종교혁명, 시민혁명 등이 일어났으나,

이 수도원은 본래 가졌던 정신의 원형을 유지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수도원이 폐쇄되었는데, 한 때 유럽 전역에 190개의 수도원을 두고

었지만 지금은 십여 군데 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하루 한 끼 식사, 미사도 은수처에서 혼자 봉헌

카르투시안 수도승들은 각자 은수처에서 독거생활을 한다.

돌덩어리로 지은 수 백년된 은수처는 3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은 작업실, 장작 보관소, 화장실이 있고, 2층은 침실, 기도실, 공부방,

성모경당이 있으며, 3층은 바닥 전체가 모래가 깔려 있다.

하느님과 함께 숨고 싶을 때 사막 같은 이곳에서 기도할 수 있다.



하루의 일과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저녁 7시 30분에 잠자리에 든다.

저녁 11시 30분에 다시 일어나서 밤기도를 마친 후 다시 새벽 3시 30분에 잠자리에 든

다.  잠을 하루에 두 번 나누어 자는 것이다. 또한 각 은수처에는 약 30평 정도 되는 정원

이 딸렸다. 음식은 점심 한 끼만 제공되는데, 조그만 구멍문을 통해 들어 온다.

아침 식사는 없고 저녁은 빵과 음료수만 먹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육식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단백질이 많은 콩이나 치즈를 자주 먹는다.


하루에 3번

-미사, 저녁기도, 아침 기도 때- 수도승들은 자기 은수처를 나와 성당으로 향한다. 

이들은 복도를 걸어 갈 때나 성당에서 기도할 때 항상 두건을 푹 덮어 쓴다. 

이는 자신의 시선에 들어오는 불필요한 것들을 차단하고 시선을 주님께만 두려는

배려다. 

이들에겐 백년 동안 전승된 고유의 카르투시안 성무일도서가 있는데 모두 그레고리안

성가로 되어 있으며, 중세기부터 내려오는 이 라틴어 전례를 원형대로 행한다.

이들은 라틴어만큼 하느님을 아름답게 찬미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고 믿는다.

매일 반복되는 전례로 인해 이곳 수도승들은 거의 모든 시편을 암송하게 되며, 불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미사를 거행할 수 있다.

불빛이라곤 성당의 감실 불빛만 빨갛게 빛날 뿐 옆 사람 얼굴도 볼 수가 없다.

수도승들은 하루에 세 번 성당에 모여 아침기도, 미사, 저녁기도를 드리는 것 말고는

절대로 각자의 은수처를 떠날 수 없다.

철저히 은수처에 갇혀 하느님과 일대일 관상에 정진해야 한다.

그리고 대개 봉쇄수도승(사제)들은 50여개의 경당에서 혼자 미사를 봉헌하며, 평수도승

과 일반수도승을 위해 봉헌되는 대성당에서 드리는 미사에는 한 명의 사제가 나가서

대로 집전한다.



성당에서 기도할 때 봉쇄수도승, 평수도승, 일반수도승의 자리가 나눠져 있다.

평수도승은 맨 끝자리, 일반수도승은 아예 성당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간에서 기도한

다.  중세 때는 평수도승과 일반수도승들은 라틴어를 몰랐기 때문에 기도에 참석할 의무

가 없었고, 봉쇄수도승 옆에서 그저 듣기만 했다.

주일 점심 식사는 대식당에 모여서 하는데, 이때에도 정해진 자리에 앉아야 한다.


평수도승과 일반수도승들은 하느님께서 봉쇄수도승(사제)들에게 주신 사제 성소를

경하는 마음에서 그들에게 순명하고 그들보다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

았다고 한다. 이 수도원의 특징은 사목적인 지향이 전혀 없고, 심지어 수도원의 다른 수

도승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관상에만 힘쓴다.

그리고 평수도승들은 봉쇄수도승들이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방해받지 않고

관상에 몰두할 수 있도록 음식을 각 봉쇄수도승의 은수처에 나르는 일, 수도복 빨래, 옷

수선 등 물질적 도움을 준다.

   
 

한편 카르투시안 수도원에선 일주일에 한번 월요일 오후에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산악 행

군을 한다. 이는 기분전환이나 레크레이션 차원이 아니라, 운동 부족을 보충하기 위함이

다.  비가 와도 취소되지 않는 이 산악행군 때에는 침묵을 깨고 말을 나눌 수 있는 기회

주어지지만, 주로 영적 대화에 몰두해야 한다.


신학 과정에 있는 수도승들은 수도원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

특정 분야의 권위자가 없을 경우, 외부에서 신학교 교수를 초빙한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고 점수를 받는 제도는 전혀 없기 때문에, 일정 시간에 마쳐야 할 진

도도 없이 각자의 역량대로 학업을 해나가도록 개별적으로 지도한다.

강의는 주입식이 아니며 철학과 신학을 가슴으로 느끼도록 고무된다.

 

관상은 보는 것 이상이다

카르투시안 수도원에 대해서 알수록 혼란이 가중되었다.

긍정과 부정의 길이 혼란스럽게 얽혀 있음을 감지하고 있다.

 [위대한 침묵] 개봉 포스터에는 '언어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

는 철학적인 문구가 적혀 있다. 실상 떠들썩하고 더 큰 자극을 요구하는 현대사회

안에 '침묵'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키워드를 제공한다.

우리 영혼의 심연 안에서 하느님을 응시하고, 세상을 사뭇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게 한

다는 점에서 관상은 '보는 것' 이상일 것이다.

그래서 사물 안에 새겨진, 그 소리와 빛깔이 발산하는 하느님의 기운을 느끼도록 돕는다

는 사실은 부박한 인생을 돌아보는 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카르투시안 수도원에서 추구하는 관상이 실질적으로 세상과 절연하고
저들 마

음 속의 천국만을 희구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옳다, 손을 들어줄 수도 없는 노롯이다.

토마스 머튼은 "가장 철저한 관상은 가장 철저한 혁명을 이끈다"고 말한다.

관상을 통해 하느님이 평등한 자비를 경험하는 자들은 세상의 어떤 기득권에서도 자유

롭게 투신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카르투시안 수도원이 불평등한 위계질서에 의존하고 있는 점이나,
강박에

따른 전통 수호에 몰두하는 모습은 좀 아쉬운 대목이다.

라틴전례 자체를 타박할 수는 없지만, 그 공동체 안에 들어온 이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고루 나눠가짐으로써, 전례를 비밀의례처럼 진행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채 신학과 철학 마저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지해서 다루어 가는

모습 역시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여겨지게 만드는 것은 나의 괜한 노파심인가 의심스

럽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존재하는 여러 방식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성과로 가톨릭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존재해야 한다는 정식을 낳았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이 구체적인 인간세상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믿음과 궤를 같이 한다. 따라서 토마스 머튼은 관상수도원에서 평생 살았지만,

"관상 자체가 목적이 되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한 바 있다.

관상을 통해 얻어진 투명한 지혜를 세상과 나누어야 할 책무가 수도승들에게도 있는 것

이다. 따라서 관상수도원 역시 다양한 스펙트럼이 가능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의문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수도원의 생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카르투시안을 비롯한 관상수도원의 모델이 되어온 베네딕토 수도원의 경우에는 "노동

하고 기도하라"는 말처럼, 노동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창조사업을 계승했다.

또한 육신을 입은 수도자로서 자신의 생계를 떳떳한 자신의 노동에 의존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한 수도사가 몇 평 안 되는 밭을 가꾸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었

을 뿐이다. 그러나 수도사들의 은수처에 놓여 있는 바구니에는 분명히 상표가 붙어있는

과일들이 놓여져 있었다.

결국 이곳에서 수도사들의 목숨을 돕는 음식들은 사들인 것임에 분명한데, 돈은?

짐짓 후원회에 의존하는가, 싶었는데, 나중에 자료를 들춰보니,
그랑드 샤르트뢰즈 카르

투시안 수도원은 보존가치가 높아서 프랑스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서 운영하고 있

다고 한다.  그렇다면 만약 정부 지원이 끊어지면 수도원 깃발을 내려야 하는가?

그들이 적은 음식으로 만족하며 청빈하게 사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세상에 어떤 희망

의 근거로 드러나는지 좀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전통을 지키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예수처럼 전통을 새롭게 창조할 필요가 다시금 요청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아무 것도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게, 이들 수도사들은 자발적 선택에 의한 가난과 침묵으로 가는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고무적이다. 우리는 다만 그들이 보여주는 복음에 대한 제한적인 비밀을 열어볼

필요가 있다. 그게 침묵이다.

우리가 침묵하기 시작할 때 말문을 여시는 분을 기억하는 것이다.

내 말을 그칠 때 비로소 이름을 불러 주시는 분, 사막에서도 빛나는 기쁨을 선사하시는

분을 기억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그들의 몫을 마저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사진/한상봉

하느님께서 너도 몰래.. 너를 보살피셨다

예전에 사놓고 읽지 않은 채 눈으로 장정만 쳐다보는 책이 있다.

크리스토퍼 메릴의 [숨은 신을 찾아서]라는 책이다.

그는 그리스 북부의 아토스 산정에 있는 동방정교회의 수도원을 찾아가며

"지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땅"이라고 불렀다.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가 준 미덕이 있다면,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발견하라

는 전갈이다.

[숨은 신을 찾아서]에서는 시리아의 성자 이삭의 말을 옮겨 놓았다.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사다리는 당신의 영혼 속에 숨어 있습니다.

죄에서 도망쳐 당신 자신 속으로 뛰어드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영혼 속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토퍼 메릴이 일상을 접고 아토스 산으로 그 여정을 찾아갔듯이,
연말연시 마음이

먼저 분주한 때에 "나는 왜 사는가?" 묻고, 이 책에서처럼 "하느님께서 너도 몰래 너를

보살피셨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오직 완전한 침묵 속에서만 우리는 듣기 시작한다. 

언어가 잦아들 때만이 우리는 보기 시작한다 

(Only in complete silence, one starts to hear.

Only when language resigns, one starts to see). 

 침묵가운데.... 거기에... 주님이.... 

 "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만 나의 제자가 될 수있다..."  

                               " 주님께서 저를 불러 주시어, 저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 죽음을 왜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모든 인간의 운명입니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집니다. 
 
                 그것이 삶의 목적입니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집니다.  
 
                     하느님을 더욱 빨리 만나려 서두룰수록
 
                 오히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다시금 발견한다는 것이 아주 큰 즐거움입니다. 
 

                 과거와 현재, 이런 것들은 인간적인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과거가 없습니다.  오직 현재만이 지배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그분은 우리 삶 전체를 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우리의 안녕을 영원속에서 보살피십니다. 
 
                     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아무런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제 눈이 안보이도록 해주신데 대해 하느님께 자주 감사드립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제 영혼의 유익을 위해
 
                 이러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음을 확신합니다.

                 세상이 하느님에 대한 모든 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 
 
                 그들은 더이상 살아가야 할 아무런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린다면
 
                 무슨 이유로 이 지상에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고 하느님의 섭리하심은
 
                 우리의 최상의 유익을 위해서이다라는 원리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행복해야 하며
 
                 절대 불행해 해서는 안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무한히 선하시고 우리를 도우신다라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만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합니다."
 
                     -카르투시안 수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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