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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용서와 화해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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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옥 [smalllark] 쪽지 캡슐

2010-06-10 ㅣ No.437535

 
♣ 마태5,20ㄴ-26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얼마전 바오로딸 수도회에서 한국 진출 50주년으로 작은 음악회와 함께 
송봉모 신부님의 특강을 연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기로 신청을 했다.
강의 주제가 '용서와 상처'에 관한 것이어서 더욱 가고 싶었다.
 
오전과 오후로 종일 베풀어진 강의와 음악회 내내 
먼길까지 서둘러 달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으로 충만했다. 
 
송 신부님의 나직하고 절도있는 유익한 말씀들은 
과거의 묵은 앙금을 시원하게 씻어준 폭포수같았고
돌아와 말씀해주신 해법대로 실천해본 결과,
무겁게 가슴에 박혀있던 대못을 쑥~ 빼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그중에서 오늘 복음을 읽으며 생각난 말씀 한마디를 소개할까 한다.
신부님은 우리가 흔히 '용서'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오해 몇 가지를 제시하셨다.
 
첫 번째 : "용서하면 상대방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오해.
두 번째 : "용서는 곧 화해다." 라는 오해.
세 번째 : "용서했으면 다 잊어야 한다."하는 오해.
네 번째 : "값싼 용서를 진정한 용서로 아는" 오해.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용서할 수 있고, 또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도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더구나 7번씩 7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명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 또한 용서하지 못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이해한 신부님 말씀의 요지는 대강 이러하다.
 
 
용서는 '나'의 결단, 의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자세나 인식, 행동의 변화와는 무관하다.
상대와 관계없이 무조건적인 용서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나'의 결단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지 못해 생기는 분노, 화, 증오(생명을 죽이는)의 독소에서 
오로지 '나'를 보호하시려고 하루빨리, 무조건, 용서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하지만 '화해'는 '나'와 '너'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나'뿐 아니라, 상대방의 태도와 인식에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전혀 알지도 못하거나 부정하며 
여전히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을 때는 '화해'가 불가능하다.
 
이럴 때 자신은 이미 용서했다고 하며, 섣불리 상대에게 화해를 청했다가는 
더 큰 상처를 각오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행동이 변하고 그가 먼저 악수를 청해오길 기다린다면
영영 화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제 화해는 가능할까?
 
 
오늘 복음 말씀처럼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즉 내가 상처를 준 당사자일 경우,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할 수 있다.
말을 바꾸면,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을 경우, 나는 그를 '용서'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일이 생각나거든 즉시 나는 '화해'를 청해야 한다.
그러니까 상처의 주체가 누구냐의 따라 '용서'인가? '화해' 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
 
........................................... 
 
여기까지가 신부님 말씀이었고 그만해도 가슴이 시원했다. 
그런데 집에 오며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의 사소한 일상 속에서는 
누가 상처를 준 주체이고 상처를 받은 객체인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얼마 전, 언니와 말다툼을 크게 하였다.
강의를 들으러 갈 때까지 서로 왕래도 하지 않는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언니는 내게 줄곧 매우 부당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용서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생각해보고,
용서와 화해의 원칙을 적용해보니까 길이 보였다.
 
내가 상처준 부분에 대하여는 '화해'를 청하자.
언니가 상처준 부분에 대해서는 '용서'를 하자.
 
나와 언니가 누가 얼마나 올바른가에 대한 '사실'여부를 따지지 말고,
내가 느낀 '감정'과 언니가 느꼈을 '감정'을 말하자. 
그리고 앞으로 서로 과도하게 선을 넘지 말자고 약속하자. 
 
 
생각할수록 서로 억울한 것 같아 말다툼하면서 
과도하게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었다.
옛날 어릴 때의 일부터 시작해서, 
앞으로의 일까지 미루어 짐작하며 흠집을 냈었다.
그러한 과도한 선을 넘는 것이 항상 문제였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자, 가슴이 시원해졌다.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하다'고 화해를 청했다.
과도하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런데 언니가 내가 한 모든 행동이 다 잘못이었다는 반성으로 
잘못 알아들을까봐, 덧붙여 말했다.
 
언니가 한 행동이 다 나에게 납득이 되어서 하는 말은 아니고,
아직도 여전히 나는 부당하다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나도 그렇게까지 말할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 관해서는 잘못 되었음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말하자면 상대방의 계속적인 잘못과 부당성까지도 그대로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송 신부님의 말씀대로 내 어려운 결단이 그야말로 
'값싼 용서' '값싼 화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의 '아야!'線(심리학에서 말하는...)을 분명히 알려주고
너의 '아야!'線을 무단 침범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용서와 화해, 분명한 개념을 알고,
그에 관한 그리스도의 명에 순종함으로써,
새삼 해방감을, 자유를 느꼈음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송 신부님의 강의와
그 강의 말씀이 고스란히 박혀있는 책(미움이 그친 순간)을 읽으며
큰 짐에서 해방된 것과 앞으로의 향방에 대한 자신감을 얻으며, 
그리고 '용서와 화해'에 대해 무척 할 말이 많지만, 참고 있었던 과거의 앙금도 씻으며
그곳에 불러주신 하느님과 수녀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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