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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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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느 가톨릭 신자의 신앙 고백 그리고 신부님의 의견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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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훈 [saint72] 쪽지 캡슐

1999-01-19 ㅣ No.69

 

  - 어느 가톨릭 신자의 신앙고백 -

 

 

 

 먼저 손 신부님의 글에서 제가 그리스 정교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던

점- 희랍 정교의 전례를 따르는 라틴 교회, 예를 들면  우크라이나의 동방

가톨릭 같은 경우 - 에 대해 정정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 글을 보시고 표현에 있어 상당히 강한(?) 어조 때문에 당혹하셨

다는 데 대해서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먼저 신부님의 말씀 중에서 루터교와 가톨릭의 의화선언 부분과 개신교인들

과의 친교 문제에 관해서는 저로서도 신부님 의견에 동감한다는 것을 아셨으

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약간은 외람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으나 신부님은

사목 활동하시는 입장에서 타 종교인들과 대화를 하시겠지만 저희 평신도

입장에서는 특히 한국이라는 특수하고도 독특한 종교적 환경으로 인해 신자

들이 타 종교인들과 일상 생활에서 접하고 부딪치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사목적인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피부에 와닿는 보다 현실적인 차원

에서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는 현재의 교황님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의견에 전적

으로 동감하면서 그분이 주장하시는 정통적인 가톨릭 보수주의에 우리 가톨

릭 신자들은 관심을 가지고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시점

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미국의 뉴스위크 지의 보도를 보면 전통적인 가톨릭 국가인 중남

미 지역에서 급증하고 있는 개신교 근본주의 특히 오순절 교회와 침례교 등

의 양상에 대해 교황께서 심각한 우려와 함께 이 지역의 가톨릭 지도자들의

각성을 촉구했다는 뉴스를 접하고서 필자는 이런 현상이 비단 중남미 지역

만의 문제라기보다 오늘날 점증하고 있는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가

톨릭의 안일한 대처로 오히려 정통적인 가톨릭 신앙의 복음을 사람들이 접

하게 되는 계기가 아니라 신흥 종교  집단 - 이러한 표현을 가급적 자제하

겠습니다만 이단이라는 말보다는 표현이 나은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사용하

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의 급증과 그로 인한 사회적 국가적 폐

해가 속출하는 데 대해 필자로서는 그냥 천주교 신자는 타 종교에 그저 관

대하게 대한다는 사회통념적인 차원에서 교리를 설명하는 걸로는 현실적으

로 부족하다는 것을 통감했기에 글을 올린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필자가 개신교에서 19년간을 지내오면서 사귄 친구들 그리고 개종하고 나

서 알게된 개신교신자인 친구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는 전도사를 마치고 목

사 안수를 받은 이도 있으며 개신교 신학생도 있습니다. 물론 군에서는 같

은 내무반 동기 중에 아주 친하게 지냈던 불교 신자도 있습니다. 필자의 경

험으로만 말씀드리면 신부님의 글에서처럼 필자 역시 개인적으로 개신교인

이든 불교인이든 간에 그들의 종교적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

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그들의 선의를 의심해야할 필요는 있을 수도 없고 있

어서도 안 된다는 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다만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리고 가톨릭 신자가 아닌 분 가운데 상당

수가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 더 나

아가서 그 둘의 위상과 역사적 분열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을 실

제로 옆에서 많이 보고 들었기에 그 상이함과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교리

설명을 진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저는 개신교에서 유아기부터 청년기까지 지냈기에 신부님의

말씀대로 제 스스로 찾은 가톨릭 신앙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개종에 이르게 된 직접적이고도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이가 생각하듯

감정의 순간적인 동요나 마음의 위안, 병의 치료, 현세적 이익, 친구의 설득

, 체면 등에 의한 아주 세속적이고도 현세적인 것에 좌우되서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잠깐 말씀드렸다시피 대학 4년간을 무신론자 그것도 유물론에 입각한 회의

론자로서 보내는 동안 저의 인생은 암흑기였으며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

정한 진리란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에 대학 4학년때 한동안  도서관에서

책 가운데 파묻혀 그것도 종교학에 관련한 서적을 탐독하던 중에 필자 나름

대로 연구하고 조사해 놓은 자료를 토대로 참 진리에 대해 깨달았기 때문입

니다. 아니 바르게 표현하자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저는 영원한 진리를 간

직한 가톨릭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 더 이상의 망설

임은 제게는 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당에 혼자서 나가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잘난 척하는 것 같아 이

런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지만 말입니다. 그 누구의 인도도 없이 나간 성당

에서 1년간의 예비자 교리반을 무사히 마치고 세례를 받게 되는 순간의  기

쁨은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었습니다.

 

 개신교 교회에서 맛보지 못한 아버지 집에 진정 내가 와 있구나 하는  편안

함과 안도감의 심정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하게 될 지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도 그리

고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 헤맬 필요도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필자가 오직 진리만을 찾아 헤매였지만 그처럼 진리를 찾을 수  있

게 허락해 주신 그분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사를 전할 길이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이성으로만 알게된 신앙이기에 어쩌면 다른 가톨릭 신자 분보다 필

자가 머리로만 신앙을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마음으

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이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신

앙은 자칫 신앙의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주체할 수 없는 열정만이 남아 자신

의 구원만을 부르짖는 이기주의의 부끄러운 모습만을 보여주게 된다는 것

또한 필자의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그동안 필자가 쓴 글 중에 다소 표현이 격한 부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면 개신교인이든 천주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무신론자든 간에 필자는 절대로 개인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습니

다.

 

 그러나 그런 것만 가지고는 480년간에 걸쳐서 갈라져 나간 형제들에  대해

우리가 그들을 이해할 수도 없으며 그들과 대화할 여지라는 것도 존재할 가

능성이 그만큼 적어진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왜 다르게 되었

으며 그토록 다른 것들에 대해 상세한 고찰이 없다는 것은 마치 의사가  환

자를 진찰함에 있어서 정상인과 어느 정도만큼 상태가 상이한 지  비교하지

도 않고 처방을 내리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현재의 개신교는 480년에 걸친 분열의 역사에 더해 그  갈리어져

나간 분파가 600여 파가 넘어 사실상 일부의 극히 제한적인 테두리  안에서

만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게쎄마니 동산에서

성부께 바쳤던 기도에서처럼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아래 하나가 되는 것은 분

명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의 의지와 시간이 허락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사필

귀정이듯이 갈라져 나간 형제들이 다시 자애로운 어머니 교회인 가톨릭교회

로 돌아오기까지는 그동안의 분열이 멈추고 역사적 분열의 시계바퀴를 거꾸

로 돌리는 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 가능할 테지요.

 

 아마도 적어도 480년은 걸리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한참동안 진행했다면 다시 원래의 바른 길로  돌아가

려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유에서 앞으로도 개신교와 천주교의 다른 점과 역사적인 분열의 원

인과 배경 그리고 그들의 신학적인  관점에 대해 특히 우리 나라에  만연해

있는 칼빈 파의 장로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이단(異端)이라는 표현과 이교(離敎)라는 표현은 될 수 있

는한 안 쓰도록 할 것을 약속드리구요.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이교(離敎)라는 것이 가톨릭교에서 분리(分離)된 그

리스도교라는 의미인 것은 한자를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전혀 우리 그리스도교와는 관계가 없는 다른 이교(異敎)라는 의미가 아닌

것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필자가 개신교인을 만났을 때 필자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도

대체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왜 가톨릭에 다니느냐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온갖 죄악의 노예로부터의 해방 (deliverance).

 

 둘째, 이 노예 상태로부터 인간을 속량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 몸값을 지불했다 (redemption).

 

 셋째,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서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게 된다 (salvation).

 

 

  개신교에서는 믿어야지만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제 2차 바

티칸 공의회(1962-1965)이전까지는 마찬가지 입장을 취했었습니다.

 

 

 A. J. 크로닌 박사의 명저 ’천국의 열쇠’를 보면 주인공 치셤 신부의 친구

이자 무신론자인 닥터 월터는 그리스도인의 위선적 행태에 반발을 느껴 그

리스도교를 믿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그리스

도인같이 죽어갔습니다.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다 자신도 그 병에 걸려 죽어

간 것입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 13)

 

 치셤 신부는 ’천국의 열쇠’는  신자이든 아니든 간에 그것을 떠나서 바로

이런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이 ’천국의 열쇠’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40년 전에 이미 출간됨

으로서 가톨릭의 구원관을 미리 예시해 주고 있는 매우 의미있는 책입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헌장(1964)에서 다음과 같이 공언하고 있습

니다.

 

 

  "먼저 가톨릭 신도들에게......공의회는 성경과 성전에 의거하여 나그네 길

 

 에 있는 이 교회가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가르친다"(14항), 그리고 "자기

 

 의 탓 없이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인정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

 

 로 올바르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구원에 필

 

 요한 도움을 거절치 않으신다."(16항)

 

 

 천주교에서는 사람들이 자유 의지로서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할 때 거기에

은총이 합쳐져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에서는 자유 의지로써만 구원된다고 합니다.

 

 개신교에서는 구원받는 데에 자유 의지는 소용이 없고 오로지 믿음이 있을

때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된다고 주장합니다.

 

 

 

 가톨릭 신앙을 가졌다는 것 그 자체가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

닙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늘 깨

 

어 있으라"(마르 13, 33) 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늘 깨어 있으려는 의식적 노력 없이는 이 세상에 대해 무지하게 되고 그것

은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들며 오만에 빠지게 할 뿐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자기 만족에서 오는 오만과 무지가  아니

라 겸허한 마음과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려 노력하는  자

세입니다.

 

 

 마음이 따뜻한 신앙인, 행동이 따르는  신앙인은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만

찾는 기복 신앙으로는 곤란합니다. 신앙은 감성적 비합리주의인 것은 틀림

없지만 이성적 합리주의가 올바른 신앙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한다

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공회 신자로 세례를 받았으며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석학이었던 동시에 무신론자로 대학 시절을 보낸 뒤에 가

톨릭의 진리를 깨달아 회심하여 게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사제가 되었

던 그 유명한 칠층산 -  미국이 낳은 저명한 설교가 풀턴 쉰 대주교는 이 책

을 일컬어 ’20세기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이라고까지 극찬해 마지

않았습니다 - 의 저자 토머스  머튼 수사가 독자들에게 쓴 답장의 일부를 여

기에 쓰면서 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뒤를 좇아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때나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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