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화)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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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책임을 하느님께 전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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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원 [silver0824] 쪽지 캡슐

2018-01-21 ㅣ No.117727

 




2018년 나해 연중 제3주일


<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복음: 마르코 1,14-20






성모자


부티노네(Butinone) 작, (1490),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집착이나 중독 증세를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무엇에 집착하는 행위는 마치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꼭 붙들고 있는 것처럼 그 사람 안에 불안감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이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극대화됩니다. 사랑 받지도 못하는데 왜 세상에 존재하게 된 걸까요? 그 불안한 존재 이유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술과 도박과 성과 힘과 성공이나 돈 등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으로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에 훨씬 큰 공허감으로 더 힘들어야만 합니다.

이렇듯 우리 존재적 불안함은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장 안정적일 때는 언제였을까요? 아마도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아기가 뱃속에 있을 때 부모가 싸우면 아기는 불안해하고 그것이 태어나서도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교에 그리 열중하는 것 같습니다. 태교는 아기야, 나와도 안전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가장 안정감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엄마 뱃속에서 느꼈던 안정감을 사회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소속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착이나 중독은 소속감의 결여가 그 원인이라 말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왜 안정감을 느낄까요? 바로 자신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기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엄마가 집니다. 무슨 말이냐면 사람이 불안한 이유는 자신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져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어떤 젊은 부부를 만났는데 외국으로 공부하러 나가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저에게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무어라 대답하면 그들에게 뭐가 좋을까요? 그건 그렇게 했을 때 자신들의 책임이 저에게도 나누어지기 때문에 좋을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관계 맺고 속하고 싶은 이유는 이 소속감을 통해 책임을 줄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젊은 부부에게 그 책임을 하느님께 넘기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중에 미쳐버릴 지도 모릅니다. 외국에 안 가도 안 간 것에 후회할 것이고 가도 간 것에 후회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이 더 낫지 않을 것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미뤄야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책임을 미루는데 서투릅니다. 책임을 미루는 사람은 못된 사람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도 반드시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어야 그 자유를 사용할 자격이 있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물론 이는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려면 어쩔 수 없는 교육입니다.

 

저는 일곱 살 생일 때 어머니가 엄마는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면 되는 거야. 앞으로 다쳐도 네 책임이고 잘 되도 네가 잘 된 거야!”라고 말씀하시며 일찌감치 저에게 저 자신에 대한 책임을 쥐어주셨습니다. 이는 마마보이가 되지 않게 제 인생을 제가 선택하며 살 수 있게 해 준 가장 귀중한 어머니의 선물이었습니다. 결혼해서까지 어머니가 자녀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물론 어머니가 일을 나가시기 때문에 저의 안전을 위해 하신 말씀이었지만 저에게는 일찍 인생은 혼자여야 함을 알게 해 준 귀한 교육이었습니다. 이때 유행했던 노래가 내 인생은 나의 것!”이었습니다.

 

부모에게 간섭받지 않는 나의 인생을 사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내 인생의 무게를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은 매우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일반 대학 다닐 때 사막 언덕을 올라가는 중에 어떤 누군가가 지친 저를 부축해 주는 꿈을 꾸고는 그 사람을 바로 좋아하게 된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부모를 떠나 독립해야 하는 것은 알았지만 제 인생의 무게를 나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엄마의 뱃속처럼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줄 사람은 만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50/50’이란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27세의 모범청년 애덤에게 치료될 확률 50%의 암 덩어리가 발견됩니다. 주인공 애덤의 친구 카일은 당연히 살아날 것처럼 애덤을 대합니다. 웃고 농담하고 즐깁니다. 심리치료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가족들도 그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암이 걸려 함께 치료를 받던 사람이 사망하자 죽음의 무게는 더 크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항암도 아무 효과가 없기에 더 암울해집니다. 결국은 50/50인 확률의 수술을 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 많은 가족과 친구들이 있지만 죽음의 무게까지 함께 나눌 사람은 없습니다. 그 무게는 사람이 나누어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주인공도 활기 넘치다가 이때에 와서는 차를 역주행하며 소리를 지르고 울기도합니다. 그러나 수술 당일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 때문인지 덤덤하게 수술대에 몸을 누입니다.

 

주인공은 실제로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사실 50%의 확률이면 작은 확률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 선택이 잘못될까봐 두렵습니다. 선택은 내가 하고 책임도 내가 져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나의 생명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느냐 죽느냐의 이 선택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집착이나 중독으로 이 현실을 잊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인간은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고서는 책임감을 분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무게까지 책임져줄 사람에게 속해야 속이 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부들을 부르십니다. 어부들은 자신들의 삶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일을 열심히 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주어진 삶의 무게를 잘 버텨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메시아란 분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다니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첫 제자들은 인간에게 안정감을 얻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었고 참된 안식을 찾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해서 나무랄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죽음까지도 책임져 줄 그분이 자신들의 가족을 책임져주지 못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가족을 굶어죽게 하실 분은 아니십니다.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낫게 해 주시는 것처럼 당신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이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에게까지 그 안정감을 넓혀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애정을 통해 얻는 행복보다 더 완전한 행복을 추구해야합니다. 그래서 잠시나마 애정을 떠날 줄도 알아야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어머니를 떠나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떠남은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더 안정된 모습으로 돌아와서 더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들이 부모님께 더 효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완전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추구하던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것 안에는 자기 자신도 포함됩니다. 사람이 이도 저도 안 되면 자기 자신 속에 소속됨으로써 안정감을 찾아보려고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젊은 부부에게 어떻게 해야 옳은지 주님께 기도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다리다 부르시면 바로 응답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분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움직이지 말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책임을 그분에게 지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맘대로 움직였다가는 내가 책임을 져야합니다. 내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반드시 가장 좋은 때에 그분께서 말씀하실 것이고 그 확신이 들면 그냥 따르면 됩니다. 그러면 인생의 무게가 매우 가벼워집니다. 자신이 자신의 책임을 지려고 하다 보니 인생이 힘든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맞습니다. 그러니 나의 것을 그분에게 넘겨드리십시오. 물론 그분은 가벼운 짐을 지어주시고 멍에도 메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잡혀 먹힐지 모르고 혼자 돌아다니는 길 잃은 황소의 삶보다는 그분 멍에를 멘 주인 있는 소가 되는 것이 행복할 것입니다. 더 큰 행복을 추구해야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품에서 미리 살 수도 있습니다. 대신 그분에게 절대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겨야합니다. 이포근한 소속감, 이 포근한 포옹은 우리가 가장 그리워하던 내 자신의 무게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에게 유일한 책임이 있다면 바로 나에 대한 책임을 그분에게 오로지 전가시킬 줄 아는 것을 배우는 책임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만 부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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