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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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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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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7-22 ㅣ No.122134

 


2018년 7월 22일

연중 제16주일

제1독서 예레 23,1-6

1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2 ─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3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할 것이다.

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제2독서 에페 2,13-18

형제 여러분,

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

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복음 마르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자신이 그 사람에게

특별했으면 하고,

 나의 불완전한 면을 채워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를 채워주는

상대방은 그리 많지가 않지요.

그 결과 기대가 실망이 되고,

 실망한 만큼 미움과 원망을

 가득 갖게 됩니다.

이렇게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주로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런데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내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기대감 때문은 아닐까요?
원망에서 나오는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어?”

라는 말들은 기대감을 잃었을 때

나오는 목소리입니다.

이는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라고

생각하는 자녀들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나옵니다.

부모 뜻대로 살지 않고

오히려 부모의 뜻에 반대로

살아가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럴 수 있어?”

라고 말하지요.

이 역시 기대감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욕심이 담긴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이기적인

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는 주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내 뜻대로 행하시길

바라면서 계속 청원기도를

바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욕심이 들어가 있는 데에는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가능합니다.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우리는

충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고 또한 병자를

고쳐주고 허약한 사람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주셨던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어느 정도였는지 복음은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마르 6,31)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너무 힘들고 지치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사라지는 것이 보통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힘든 상황에서도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피하지 않고

더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마르 6,34 참조).

조금도 쉬지 못하게

다가오는 사람들,

더군다나 이렇게 열광적으로

자신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반대할 것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받아들이고 나눠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는 자신이 사랑한 만큼

상대방도 사랑을 줘야한다는

기대감이 없습니다.

자신을 반대하고 또 당신 수난의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까지도 그대로 인정하는

조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는(예레 23,4)

단 한 명도 구원의 길에서

제외시키지 않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 예언자가

 예언하여 말씀하신 주님의

 공정이고 정의였습니다(.

예레 23,5 참조).
사도 바오로는 이 사랑의

예수님을 통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에페 2,13 참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닮아서 주님의 길을 따를 수

 있도록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가득한 나의 기대감을

다른 이들에게 채우려는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는 주님의 모습처럼

내 이웃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마르 6,34 참조).

 바로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기대만을

내 새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아픔과

상처를 겪으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로 이들에게 사랑으로

다가오는 착한 목자의

모습을 우리 역시

따라야 한다면서 주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랑의 삶이 필요합니다.

이 삶이 주님의 구원 사업에

기쁘게 동참하는 진정한

정의가 실현되는 길입니다.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라.

그러나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

(아프리카 속담)

성지에 오시기 힘든 분들을 대신해서

성지에 있는 신부들이 켜드리는 봉헌초.

"도전"

(안드레아 슈바르츠)

그리스도인이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놔두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모든 것이

마땅히 되어야 할 상태로 이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출발이고 시작이며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떠나는 것,

 내려놓는 것,

풀어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구이자

내가 맞서야 할 도전입니다.
안드레아 슈바르츠

신부님의 글입니다.

신부님의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을 따라야 할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절망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닌,

모든 것에 도전하면서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계신가요?

 

 

어제 멀리서 순례를 오셨습니다.

대구대교구 포항 죽도성당 교우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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