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보도자료] 오는 20일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180주기 추모 현양 대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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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국관리자 [commu1] 쪽지 캡슐

2015-10-08 ㅣ No.1013

 


위험한 조선 사목, 제가 하겠습니다!”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180주기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추모·현양 대미사

20() 오후 2시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간행 준비도

 
 
 

이런 위험한 사업(조선 사목)을 기꺼이 맡고자 하는 신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1829519일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 장상들과 각지의 회원들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1794년 주문모 신부(1752-1801, 2014년 시복)가 최초로 조선에 도착하여 선교활동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후, 어떤 선교회도 조선 선교에 나서지 않았다. 그때 30대 초반의 신부가 열정적으로 조선 선교를 자원했다. 그가 바로 조선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Bruguiere, 한국 성은 소 蘇,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1792-1835) 주교이다.

오는 20일(화)은 브뤼기에르 주교 180주기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교구장 염수정 추기경)는 이날 오후 2시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천주교 서울대교구 용산성당 구내)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80주기 추모·현양 대미사’를 봉헌한다.

이날 미사에는 교구장 염 추기경, 총대리 조규만 주교를 비롯해 교구 사제단과 신자 2천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미사 전 오후 1시부터는 용산성당 구내 전역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브뤼기에르 주교의 생애를 담은 영상을 상영하고, 브뤼기에르 주교 현양을 위한 묵주기도가 진행된다.

 





한편,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원종현 신부)도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80주기를 맞아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간행을 준비한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남긴 서한과 관련 글은 100여 통에 달한다. 이중 현재까지 여러 간행물을 통해 공개된 서한은 56통이다. 연구소는 지금까지 공개된 적 없는 나머지 서한들을 정리해 간행할 예정이다. 올해 11월 작업을 시작해 내년 8월 간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누구인가 

○…꿈에도 조선을 그렸지만 조선 땅을 밟지 못한 조선 초대 교구장    

조선 선교에 죽음의 칼날이 드리워져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조선으로의 파견을 자원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1년 9월 초대 조선 대목구장1)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3년 동안 중국 대륙을 횡단하며 조선 입국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안타깝게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두고 마가자(馬架子, 지금의 적봉시 송산구 ‘동산’), 즉 펠리구(Pie-li-keou)라고 불리는 서부 달단(지금의 중국 내몽고 지역)의 한 교우촌에서 뇌일혈로 눈을 감고 만다.

그러나 그가 아니었으면 목자 없이 방황하던 조선교회가 교구로 설정되는 일은 불투명했을 만큼 한국교회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유해는 1931년 조선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한국으로 옮겨와 서울 용산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다. 선종 후 96년 만의 일이다.



○…조선 교회의 운명을 돌린 뜨거운 사명감

브뤼기에르 주교는 1792년 프랑스 레삭에서 태어나 1815년 사제품을 받은 뒤 해외선교에 뜻을 품고 1825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그 즈음 조선의 신자들은 조선 교회에 사제를 파견해주길 요청하는 서한을 교황에게 보냈다. 교황의 지시로 교황청 포교성성(지금의 인류복음화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이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의뢰했지만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 선교가 불가능한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운 공동서한을 작성해 전교회 회원들에게 보낸다.

태국(당시 시암 대목구)에서 선교사로 사목하던 중 이 서한을 접한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9년 5월 전교회 본부에 조선 선교의 당위성을 조목조목 역설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내면서, 자원하는 선교사가 없을 경우에 본인이 직접 조선으로 가겠다고 의사를 밝힌다.

또한 그해와 이듬해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에게 서한을 보내 교황의 허락을 얻어주도록 간청한다. 그의 이 편지 덕분에 조선 교회의 운명은 기사회생의 길을 걷게 된다.

1829년 6월 브뤼기에르 주교는 주교로 임명되었고, 조선에 대한 선교 열정을 점점 더 굳히고 있었다. 조선 포교지를 담당할 선교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포교성성 장관 카펠라리 추기경은 진지하게 조선교구 설정을 고심했다.

때마침 1831년 카펠라리 추기경이 새 교황으로 선출된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바로 그이다. 같은 해 9월 9일 교황은 조선 포교지를 북경 교구에서 독립하여 조선 대목구(代牧區)로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한다.


△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조선대목구 설정 교서(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이미 페낭과 싱가포르 등지에서 활동하며 중국으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7월 임명사실을 확인하고 곧바로 배를 타고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해 조선 입국을 위한 여행길에 오른다.

○…조선교구를 위한 선견지명, 조선 천주교회 지켜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미 자신이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나는 페낭을 떠나면서 내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습니다”(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 10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예리한 선견지명으로 자신이 조선에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조선 천주교회가 사멸하지 않도록 사전에 몇 가지 조처를 취했다.
 
첫째, 1833년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교구를 맡도록 청원했다. 이로써 기해박해(1839) 등 여러 번의 박해에도 프랑스 선교사들이 계속 조선에서 선교를 하며 가톨릭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1942년 서울대목구장으로 노기남 주교가 임명될 때까지 약 110년 동안 조선 교회를 위해 선교사를 파견하고, 선교자금을 보내며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했다.
 
둘째,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신부 등 탁월한 선교사 세 명을 발탁하여 조선 선교를 맡겼다. 이 중 성 앵베르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 교구장직을 승계하여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다. 이들은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한다.
 
셋째, 브뤼기에르 주교의 노력으로 1838년 신설된 만주 요동 교구를 북경 교구에서 독립시켜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맡도록 하여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는 데 전초 기지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또한 교황청에서는 동아시아 지역에 대해 스페인, 포르투갈과의 정치적 입장을 배제하고 오직 신앙적인 관점에 입각한 선교정책을 펼칠 수 있는 포석을 놓게 됐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 언론홍보팀




1) 대목구장(代牧區長):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되지 않은 지역의 교구장으로서 교황의 대리라는 자격으로 파견된 고위성직자를 이른다. 지역 선교를 맡은 선교, 수도회의 일원에게 맡겨지는 직무로 교구장 주교와 법률상 동등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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