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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창세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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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5-22 ㅣ No.120623

 

 

공동번역성경

 

죄와 벌

 

(창세20:118)

1 아브라함은 그 곳을 떠나 네겝 쪽으로 자리를 옮겨 가다가 카데스와 수르 사이에 있는 그랄에 이르러 거기에 정착하여 살게되었다. 2 그 때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했다가 사라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불려 들어가는 변을 당하였다. 3 그 날 밤 하느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시어 '네가 맞아들인 여인으로 하여 너는 죽으리라. 그 여인은 남편이 있는 몸이다.' 하고 이르셨다. 4 아비멜렉은 아직 사라를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말하였다 '주여, 당신은 죄없는 사람도 죽이십니까? 5 그들은 분명히 서로 오누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조금도 마음에 걸리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 손은 깨끗합니다.' 6 '네가 마음에 걸릴 일을 하지 않은 줄은 나도 안다. 그러나 나에게 죄를 짓지 못하게 너를 지켜 준 이가 누군지 아느냐? 너로 하여금 그 여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나다. 7 그러니 그 여인을 곧 남편에게 돌려 보내라. 그 남편은 예언자다.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네가 죽지 않으리라. 만일 그 여인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는 물론 네 식구들도 다 죽으리라.' 8 아비멜렉은 아침 일찌기 일어나 종을 다 불러 모으고 이 일을 그들에게 낱낱이 들려주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 들여 꾸짖었다. '내가 너에게 무슨 못할 일을 했기에 너는 나와 내 나라에 이렇듯이 엄청난 죄를 뒤집어 씌웠느냐? 너는 나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하였다.' 10 그리고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물었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느냐? ' 11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이곳에는 하느님 두려운 줄 아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아내 때문에 맞아 죽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12 더구나 사라는 정말 내 누이이기도 합니다. 같은 아버지의 피를 받은 누이입니다. 어머니가 달라서 내 아내가 된 것입니다. 13 집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분부를 받았을 때 나는 사라에게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를 것을 당부해 두었던 것입니다.' 14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양떼와 소떼, 남종과 여종을 주면서 그의 아내 사라도 돌려 주었다. 15 그리고 나서 아비멜렉은 말하였다. '보아라. 내 땅 어디든지 네 마음에 드는 곳에 가서 살아라.' 16 그리고 사라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네 오라비에게 은전 천 닢을 주었다. 그 은전 천닢은 너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 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보증해 주리라. 이로써 너는 모든 사람앞에 결백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17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기도하니 하느님께서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아기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 18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때문에 야훼께서는 아비멜렉의 집에 있는 모든 여자의 태를 닫으셨던 것이다.

 

우리는 지난번까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그 속에서의 롯의 처신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하느님의 계속되는 경고를 무시하고 무서운 심판의 불 속에서도 자기가 누리던 세상의 쾌락과 안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지체하며, 눈앞에 정욕의 마지막 보루인 소알을 놓지 못했던 롯의 불신앙은 결국 모압과 벤암미라는 하느님의 대적들을 출산하는 것으로 후대들에게 부끄러운 본보기가 되고 그렇게 부끄러운 모습으로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소돔 심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시던 그 곳으로 아브라함을 이끄시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불길을 직접 목격케 하셨습니다.(창세19:28) 아브라함은 그 곳에서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와 철저한 심판에 대한 확실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경외하며 자손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을 전율 속에서 절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19장에서의 아브라함은 롯과 대조가 되어 훌륭한 계약의 백성으로 등장합니다.

심지어 소돔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느님을 막아서서 목숨을 걸고 中保의 기도까지 올리는 그런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0장은 그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에 환호했던 우리를 또 다시 아연(啞然)케 합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좇아 살지 않는 죄인들의 말로가 어떻게 처참하게 끝이 나는지를 금방 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년이면 약속의 자손 이사악이 사라의 태를 통해 태어날 것이라는 하느님의 약속도 받아놓은 사람입니다. 그 말은 그 때 이미 사라의 배속에 약속의 자손인 이사악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25년 전 이집트왕 파라오에게 자기 아내를 팔았던 때와 똑같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넘깁니다.(아비멜렉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이집트의 왕을 파라오라 부르듯이 그랄의 왕을 총칭하는 단어)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파는 아브라함에게는 명년에 자기 아내 사라를 통해 약속의 자손을 주신다고 하신 하느님의 약속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을 소중하게 여겼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기 아내 사라를 지켰을 것입니다. 사라가 없으면 그 약속은 지켜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그저 자신의 안전과 안일만을 챙기고 있는 어리석은 소인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성경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실수를 통하여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싶은 것일까요?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창세기 20장의 이야기가 어떤 맥락을 타고 흐르고 있는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 15장에서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 예식을 보았습니다. 쪼갠 고기 사이로 홀로 지나가시는 하느님의 그림 속에서 하느님의 계약은 인간 쪽에서의 그 어떠한 것도 근거하지 않은 하느님의 쪼개짐에 의해 완성된다는 은혜계약의 밑그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6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이라는 인간 쪽에서의 산물(産物)을 하느님 앞에 제시했고 하느님은 13년간 침묵하심으로 그들의 행위를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 17장에서 하느님의 할례 계약이 주어집니다. 하느님은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엘샤다 이 코람데오라는 말씀을 통해 내 백성아 너희는 전능한 내 앞에서 너희를 부인하고 나에게 항복하고 순종하라, 그게 너희가 온전케 되는 유일한 길이다.’ 라는 은혜계약의 핵심 내용을 전제하신 후에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식속들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할례는 쪼개짐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17장의 할례 계약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계약이 하느님의 쪼개짐에 의해 완성이 될 것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심과 동시에 그 하느님의 쪼개짐이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들의 몸에 새겨진 흔적처럼 전가 될 것임을 주지시켜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계속해서 계약의 자손의 탄생에 관한 인간 쪽에서의 근거를 기각시키시고 하느님의 은혜만이 계약의 자손을 탄생케 하실 수 있음을 반복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러한 할례 계약을 받아 들고서도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하느님을 비웃었습니다.

 

(17:15~17) 15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분부하셨다. '네 아내 사래를 사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말아라. 그의 이름은 사라이다. 16 내가 그에게 복을 내려 너에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리라. 그에게 복을 내려 많은 민족의 어미가 되게 하고 그에게서 민족들을 다스릴 왕손이 일어나게 하리라.' 17 아브라함은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우스워서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보다니! 사라도 아흔 살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 하고 중얼거렸다.

18장으로 넘어오면 사라의 비웃음이 이어집니다.

(18:10~15) 10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 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등지고 서 있는 천막 문어귀에서 이 말을 엿듣고 있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늙은이였고 사라는 달거리가 끊긴 지도 오래였다.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으로 다시 보랴!' 하고 중얼거렸다. 13 그러자 야훼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사라가 다 늙은 몸으로 어떻게 아기를 낳으랴고하며 웃으니, 될 말이냐? 14 이 야훼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에 내가 다시 찾아 오리라. 그 때 사라는 이미 아들을 것이다.' 15 그러자 사라는 겁이 나서 웃지 않았다고 잡아뗐으나, 야훼께서는 '아니다. 너는 분명히 웃었다' 하시며 꾸짖으셨다.

이렇게 하느님의 계약의 자손인 이사악의 출생에 관한 약속과 그의 출생이 인간적인 조건과 상황 속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임이 반복하여 제시가 되고 21장에서 드디어 이사악이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 21:14) 1 야훼께서는 약속대로 사라를 돌보셨다. 사라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시니, 2 사라가 임신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때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3 아브라함은 사라가 낳아 준 아들을 이사악이라 이름지어 불렀다. 4 하느님의 분부를 따라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이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베풀었다.

 

인간 쪽에서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이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에 의해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사악이 태어났을 때의 아브라함 나이가 100세였다는 것은 인간적인 불가능함 속에서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창조가 일어났음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인간 쪽에서의 불가능함에 대한 선언과 증거 그리고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의한 이사악의 탄생 사이에 들어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약속의 자녀는 아브라함의 인간됨이나 아브라함이 내놓은 신앙의 성숙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만 창조케 됨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브라함의 실수가 이사악 탄생 바로 앞에 확인도장처럼 등장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멕렉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 시작된 하느님과 아브라함과의 계약에서부터 시작하여 이해를 하면 쉽습니다. 12장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계약들이 아브라함의 파렴치함 속에서 하나하나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하느님은 막연하게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고 그가 복의 근원이 되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후반부를 보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를 해 주지요? 하느님의 계약이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무슨 대단한 신앙의 경지에서 그렇게 하나요? 그가 복의 근원의 역할을 보여준 때는 자기 아내를 팔아먹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 그때였습니다.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요? 하느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열심에 의한 것이 아닌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성취되는 것임을 알기쉽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약은 창세기 15장에서 후손으로 이어집니다.

 

(창세15:4~5) 4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를 이을 사람은 그가 아니다 장차 네 몸에서 날 네 친 아들이 네 대를 이을 것이다.' 5 그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이 불어날 것이다.'

아브라함이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인데 그 민족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조금 더 밝게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후손이 배속에 들어 있음에도 하느님의 약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팔아먹는 믿음의 조상의 실수가 적나라하지요. 그럼에도 하느님의 은혜로 사라가 풀려나고 21장에서 이사악이 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시 하느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후손도 아브라함의 노력이나 자격, 열심 등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혜로 주어지게 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계시는 17장에서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17:58) 5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리니, 네 이름은 이제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 불리리라. 6 나는 너에게서 많은 자손이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왕손도 너에게서 나오게 하리라. 7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어 주기로, 너와 대대로 네 뒤를 이을 후손들과 나 사이에 나의 계약을 세워 이를 영원한 계약으로 삼으리라. 8 네가 몸붙여 살고 있는 가나안 온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리라.'

창세기 12장에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큰 민족과 나라는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후손에서 시작하여 만국 왕으로 나라들로 번성케 될 것이 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계약은 만국의 아비와 믿음의 조상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거기서의 만국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믿음의 조상 또한 교회의 조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서 이사악이 태어나지 않으면 그 모든 약속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상황에서 이사악의 어머니 사라를 그랄 왕에게 주어 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사악과 그 이사악으로 말미암게 되는 만국처럼 많은 무리인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오직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탄생케 된다는 은혜의 복음이 20장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느님의 구원과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의 인간 쪽에서의 불가능함과 무력함,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의 왕 노릇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고전1:2629) 26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27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8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9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하시는데 있어서 인간의 지혜나 재능이나 열심 등을 들어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일을 하심으로 인간 쪽에서 내어놓는 모든 것들을 무효시키시고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게 하느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부 바보 천치에다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구원에 있어서 하느님 앞에 먼지만큼이라도 자신의 자격이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 세상의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받는 것, 없는 것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어떤 실수를 해도 결국은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더라는 방종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그토록 보잘것없고, 불가능한 자들에게 은혜로 찾아오셔서 오직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지혜와 당신의 사랑으로 그들을 건져 내시더라는 은혜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이나 열심을 의지하여 자랑하지 말고, 불가능한 자기를 부인하며 하느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라는 것이 성경 전체의 권고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1:30~31)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 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31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이렇게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아내는 죄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자랑하는 자로 회복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얻어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거저 받은 자들이므로 그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는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자랑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은 그 가 누구에게 전적으로 순종하고 의뢰하여 살아야 하는 상태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들이 바로 하느님께 오롯이 순종하여 사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자신의 안전과 안일을 위해 두 번씩이나 아내를 팔아먹은 아브라함, 심지어 하느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사악이 사라의 태중에 있었음에도 서슴없이 그랄 왕에게 아내를 주어버린 아브라함의 불가능하고 무력한 모습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오직 당신의 은혜로 우리 안에 새 창조를 시작하신 것이고 홀로 그 창조를 완성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전적인 타락과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확실하게 깨닫게 될 때 우리 안에서는 자랑이 없어지게 되고 오직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영광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못나고 불가능하고 여전히 반복적이며 의도적이며 계획적으로 죄를 짓는 그러한 우리를,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로마 5:8) 찾아오셔서 약속의 자녀로 삼아 주신 우리 하느님의 그 크신 은혜의 깊이를 아는 만큼 우리는 자기 자신을 부인할 수 있게 되고 순교의 자리까지 낮아질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순교가 뭡니까? 세상 적으로 볼 때 순교는 실패의 절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느님을 향하여 가진 헌신들이 이 땅에서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현장이 순교의 현장입니다. 성도가 가진 진리와 능력들이 세상의 능력에 꺾이고 압도당하는 현장이 순교의 현장 아닙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순교를 신앙의 최고 경지로 꼽습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자기의 목을 내어 놓으면서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며 기쁘게 세상을 떠나는 것, 바로 그 순교의 정신을 핵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사상인 자기 부인의 최고 능선이 지요

우리는 매순간 바로 그 순교자의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성도입니다.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우리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길만이 유일한 길임을 깨닫고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우리의 모든 것을 던지라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순교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성도를 가리켜 순교자라 부르는 것입니다.(묵시6:911, 11:8) 성도의 표지인 사랑의 다른 말 또한 순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은 반드시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고전 13:5) 자기의 손해와 상함을 전제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랑이 발휘 될 때 그 현장에는 반드시 손해 보는 이가 있습니다. 시간을 손해 보기도 하고, 물질을 손해 보기도 하고, 자기 자존심을 손해 보기도 합니다. 그 때 진짜 사랑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내 것이 비워지고, 죽어짐으로 해서 다른 이들이 유익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순교라 하는 것이고 그 순교적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모든 성도를 순교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러한 순교자들의 피를 타고 면면히 흘러 내려온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과 성공에 의해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순교의 현장에서도 과감히 원수들을 향해 자신의 목을 내어 놓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하느님 나라를 확장 해온 것이고 완성시켜 가고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가 교회를 탄생시킨 것처럼 수많은 예수의 형제들의 순교의 삶이 또 다른 형제들의 새 창조에 기여하여 그리스도교는 이렇게 확장이 된 것이며 앞으로도 그 십자가의 원리에 의해서만 하느님 나라는 확장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엔 웬 능력의 종들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날의 교회는 자기부인이 아니라 자기존재의 과시를 위해 하느님의 능력을 이용하려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온전해 지고 하느님의 강함이 드러나게 된다(고후12:9)를 그토록 많이 읽고 배웠음에도 내가 강해져야 하느님의 일도 더 잘된다는 사기가 정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이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모두 죽음의 불길 속으로 던져져야 하는 땔감들에 불과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의 본체이신 예수가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해서 우리가 이렇게 위대한 성도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보세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아닌 망나니에 불과합니다. 그는 21장에서 태어날 이사악이 없으면 만국의 아비도 믿음의 조상도 될 수없는 가련한 티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에게 은혜로 주어지게 될, 하느님이 준비하시고 탄생케 하시는 약속의 후손 이사악이 태어나게 되고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따라 만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약속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지옥의 땔감에 불과한 자들입니다. 자신의 유익과 만족과 쾌락을 위해 가장 가까운 이웃인 아내까지도 수시로 팔아먹을 수 있는 그런 파렴치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은혜로 약속의 후손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를 건져 내셨고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고 너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는 당신의 약속을 성취해 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상기(想起)해 보세요. 잘못은 아브라함이 했는데 하느님이 아비멜렉을 혼내십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말대로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행하는 자였습니다. 자기가 아브라함에게 속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아침 일찍 이러나 그 일을 바로잡는(8) 경외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못할 일을 했기에 너는 나와 내 나라에 이렇듯이 엄청난 죄를 뒤집어 씌웠느냐? 너는 나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하였다.'(9)’하고 아브라함의 잘못을 나무라는, 아브라함보다 훨씬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참에 아브라함을 버리시고 차라리 아비멜렉을 택하셔서 다시 시작하시는 편이 나을 듯 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예언자라 부르셨고 아브라함이 기도해야 아비멜렉이 살 것이라는(7)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根源으로 삼아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지요?(12장) 하느님은 그 상황에서도 당신의 택한 백성인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실수와 실패로 이어지는 삶을 사는데 하느님께서 은혜로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죄로 심판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나타나셔서 협박을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죄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약속하신 명년에 태어날 이사악 때문에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죄의 결과로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죄를 덮어버리는 은혜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다가 머리를 빳빳이 쳐들고 자신의 능력과 성공을 자랑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 것들이 하느님의 일에 도움이 될 거라고 요? 천만에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혜의 왕 노릇에 의해 주관되고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은혜가, 同邦 연합군의 뒤를 좇아가 그들을 쳐부수고 롯과 전리품들을 빼앗아오는 두려움 없는 신앙을 만들어 낸 것이고, 소돔을 멸하러 가시는 하느님을 막아서서 중보기도를 올리는 중보자로 만들어 낸 것이고, 모리야산에서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사악을 아낌없이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완전한 자기부인의 모델로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열심과 능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사악을 낳기 바로 전에 아브라함이 어떠한 자인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업적을 하느님 앞에 내놓으며 나 잘했지요?’하고 자랑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로마14:7~9) 7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은 우리가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느님을 머슴처럼 불렀다가 돌려보냈다가 하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살라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가 자기 자신이 인생과 우주의 왕이 되어 살던 그 자리에서 내려와 주님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주님이 가난하라면 가난해야 하 며 주님이 병들라면 병을 감수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십자가가 섰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백성이지 주님을 이용하여 나의 영광을 챙기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때 우리가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로 성숙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자기 부인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확장이 되는 것입니다.

제발 자기를 증명하려 하지 마세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마세요. 피조물이 유()의 자리에서 내려와 우리 자신이 무()임을 자각하고 깨닫는 무()에로의 창조가 바로 새 창조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힘을 이용하여 유명해 지려하고 많이 가지려 애를 쓰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요?


(루가16:15) 15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창세12:13) 1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느님의 능력을 요구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러한 일이 자신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위함이라는 거짓말도 하지 마세요.

나는 자꾸 否認되고 우리 하느님의 능력과 영광과 은혜가 드러나는 참 성도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죽을 사()자를 풀어보면 하나 일(), 저녁 석(), 비수 비()’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하룻저녁에 비수처럼 날아드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대 낮에 날아오는 비수는 어찌어찌 막아볼 수 있겠지만 어둠 속에서 날아오는 비수는 피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렇게 죽음은 느닷없이 비수와 같이 찾아오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살 생()’자는 삐칠 별(丿)과 앉을 주()’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명이란 있던 자리에서 삐쳐 나와 다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황혼녘에 느닷없이 날아드는 비수에 맞아 죽음으로 떨어질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자리에서 우리를 삐쳐 나오게 만드시고 그 자리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앉혀 놓으셨습니다. 그 죽음이라는 비수에 예수가 맞아 죽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삐쳐 나와 생명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게 구원이며 그 은혜의 구원을 깨닫고 자신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순교의 삶, 사랑의 삶을 사는 신앙인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지루하시죠?  조금만 더 참으세요.

열심히 삽시다.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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