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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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과 목숨을 다해 참을 수도 있어야만 / 사순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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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7-03-24 ㅣ No.110971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둘째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8-31 참조)’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 정성을 다해 사랑하라신다. 그리고 당신께서도 실제로 그리 사셨다. 봄철엔 바람이 유독 많이 분다. 자주 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단다. 나무는 가지마다 새싹을 틔우려 할 게고 그러려면 물을 끌어 올려야 하리라. 이 때 바람은 가지를 흔들어 물 끌어올림을 도와준다나. 그래서 봄철에는 대체로 바람이 많단다. 소위 신비의 자연현상인 봄바람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자연의 바람처럼 사랑의 싹을 틔우라시며 은총의 물을 주신다. 그러니 우리도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가는 봄바람이 되어야만 할 게다. 그를 위하여 남모르는 기도로 선행을 베풀자. 사실 우리도 때로는 바람을 탄단다. 가끔씩 선한 감정과 아름다운 느낌에 가슴 울렁이면서 어딘가에 휩싸인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봄바람 덕택일까, 그들과의 관계를 촉촉하게 하라는 그분 배려일까!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더 많아지는 것 같은 부푼 감정이 어느 날 문득 솟구친다. ‘사랑은 하나이되 그 대상은 둘, 곧 하느님과 이웃이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외침 역시 신선한 봄바람마냥 스민다. 하느님 섬기면서 이웃을 소홀히 하지 않고, 이웃 섬기면서 하느님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게 균형 잡힌 신앙인의 자세이다. 십계명에는 이 두 가지가 담겼다. 앞의 세 가지는 하느님 사랑, 나머지 일곱 가지는 이웃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절대계명이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게 아닌, 신앙인이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의무이다.

 

가끔은 우리는 늘 하느님을 찾지만, 그분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를 잘 모른단다. 율법의 본디 기능은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 사람들의 만남, 그리고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규정하는 것일 게다. 일상에서 하느님에 대한 경배는 따로 떨어진 게 아닌, 사랑 안에서의 만남이다. 그분께서는 신선처럼 다가오시는 게 아닌, 사랑 안에서만 체험되시는 분이시기에. 위로와 보살핌이 필요한 이들, 영혼과 육신이 지쳐 있는 벗들에게 손을 내밀 때 사랑이 피어오른다. 그 속에 머물러야만 '사랑이신 하느님'을 몸소 체험한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으로 스스로 그분께 다가가는 길을 막는 일이 종종 있다. 우리의 무의식으로 벌하시는 심판관, 또 감시자라는 부정적인 하느님 모습 때문일 게다. 따라서 그분을 오직 자비로운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긍정의 마음을 안아야만 할 게다.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회개를 하라신다. 그 회개는 제물로 당신 호의를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만든 우상을 하느님이라 부르지 않으면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는 하느님 자비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회개와 새로운 변화를 소망하는 이 사순 시기에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확신하는 것일 게다.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께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회개하고 돌아오려는 죄인에게 분노를 거두시며, 그의 생명이 다시 향기를 내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옳은 길로 가도록 치시기도 하시지만, 결국은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싸매 주신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으로 스스로 다가서는 길을 막아서는 일이 많다. 이렇게 두려움 일색의 하느님 모습이 지배할 때 우리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무거운 마음은 사랑의 계명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게 한다. 이러한 부담을 덜고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출발일 게다. 우리가 그분 자비를 믿으면서 기꺼이 회개를 바란다면, 찐한 묵상, 어린아이와도 같은 무조건적 신뢰, 순수한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언제라도 사랑의 척도는 인내와 용서이다. 문제는 이웃의 범위이다. 유다인들은 애당초 민족 전체를 이웃으로 여겼다. 그러다 세월 따라 이 범위를 점점 축소해 나갔다. 차츰 비슷한 이끼리, 잘사는 이끼리, 같은 학파끼리 이웃으로 했다. 따라서 자신과 같은 부류만 이웃으로 받아들였던 게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와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런 차별을 없애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이웃의 범위를 원수 취급한 이방인은 물론, 죄인을 비롯한 그 어떤 처지에 놓인 이까지도 이웃으로 무한히 확장하셨다. 이 사순의 시기에도 자연 오는 봄은 어김없다.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분다. 무심코 바라보는 바람이지만 나무에게는 고맙기 그지없는 바람일 게다. 우리도 그런 바람이 되어야만 하느님의 기운을 전하리라. 하느님의 음성이 봄바람을 타고 온다. 사랑한다면서 상대의 힘을 빼앗는지를 가끔은 돌아봐야 한다. 마음과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면, 마음과 목숨을 다해 참을 줄도. 오늘 우리는 나의 이웃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누구까지를 이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 점에 대해 늘 묵상했으면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http://blog.daum.net/big-l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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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사랑,이웃 사랑,사랑의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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