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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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22 -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 묵상 -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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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2-22 ㅣ No.110262




2017년 02 22 () 가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 묵상


베드로 1 5,1-4
마태오복음 16,13-19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셨다.’ 신앙은 인간의 살과 피를 위한 소원성취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6세기 교회가 분열되어 개신교회들이 출현하면서 가톨릭교회는 이 말씀을 근거로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있는 가톨릭교회만이 예수님이 세운 교회라는 주장입니다. 그 반면, 개신교회들은 이 복음 말씀에 나오는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이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부터 개신교회들과 가톨릭교회는 이 문제로 더 이상 다투지 않습니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에 속하는 성서학자들이 모두 이 말씀은 예수님이 교회를 창립한다는 선포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서에만 있습니다. 이 복음서를 집필한 시리아의 교회는 베드로 사도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베드로를 신앙인의 대명사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다는 이야기에서도 마태오복음서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 물위를 걸었다고 말합니다(14, 22-33). 신앙인은 어두움과 고통의 심연 위를 예수님의 말씀 따라 걷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그리스도 신앙인의 정체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있은 다음, 예수님이 교회 설립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정체성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며, 그분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듣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하느님은 살아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으면, 그 사람의 뜻을 소중히 생각하는 실천들이 발생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는 그분의 일을 실천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당신들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 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듯이, 우리도 그분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들 가운데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가 가르치던 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제물 봉헌에 충실하면, 의인이 되고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교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을 인간 죄에 대해 하느님이 주시는 벌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결국 유대교는 이 세상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원리를 하느님에게 적용하여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살과 피’, 곧 우리의 이야기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호칭에는 인간 생명의 은혜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家父長) 사회였던 그 시대,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자녀를 위한 어머니의 역할도 당연히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감사로부터 신앙이 시작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과거의 사실을 자주 언급하고, 해방절을 해마다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은 그 사건이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은혜로운 분이라고 믿는 사람은 자기도 은혜로움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죄를 용서하신 것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실천하지 않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성서는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당신의 삶으로 보여 주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등지고 광야로 가서 하느님만 생각하며 살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의 것”(마르 10, 1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유치하게 되라는 말씀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부모를 신뢰하고 따르듯이, 하느님 앞에 우리도 믿음과 신뢰를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부모 앞에서 우월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어떤 구실로도 사람들 앞에 우월감을 가지고 행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가 행복하고”(루가 6, 20)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 43)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로 우월감을 찾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을 인류역사 안에 살아있게 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그런 실천을 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면서 재물과 권력을 자기 삶의 최대 보람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인 공동체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 우월감을 가지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는 자세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에 속하는 신앙인은 교회 안팎의 가난한 사람, 버려진 사람, 불행에 우는 사람을 돌보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과거 세상은 신분 사회였습니다. 높은 사람이 행세하고 낮은 사람은 순종하는 사회질서였습니다. 유럽 중세 교회는 그런 질서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믿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도 권위를 가진 신분이 있고,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하는 신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자기가 속하는 집단의 일에 각자가 자기 능력껏 자유로이 참여하고 기여하면서, 정체성을 실현하는 질서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도 신앙인 각자가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실현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한다고 그것이 예수님의 일이 되지도 않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지도 않습니다. 교회 구성원들은 각자 역할을 달리하면서 모두 함께 하느님의 일을 찾아 실천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을 믿고, 각자 자기의 창의력을 동원하여 그분이 하신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합니다. 사람이 통솔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과 하느님의 일이 보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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