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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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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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리원 [silver0824] 쪽지 캡슐

2017-03-19 ㅣ No.110844

 




2017년 가해 사순 제3주일


< 솟아오르는 영원한 샘물
 >


  
복음: 요한 4,5-42






그리스도


엘 그레코 작, (1606), 톨레도 주교좌 성당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감히 제가 감히 그녀를 사랑합니다. 조용히 나조차 나조차도 모르게, 잊은 척 산다는 건 살아도 죽은 겁니다. 세상의 비난도 미쳐 보일 모습도 모두 다 알지만 그게 두렵지만 사랑합니다. 어디에 있나요? 제 얘기 정말 들리시나요. 그럼 피 흘리는 가엾은 제 사랑을 알고 계신가요? 용서해 주세요. 벌하신다면 저 받을게요. 허나 그녀만은 제게 그녀 하나만 허락해 주소서.”

 

임재범의 노래 고해가사입니다. 이런 노래를 신학생에게 보내오는 자매들도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신학생이 더 즐겨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왜 하느님과 여자를 함께 사랑할 수는 없을까? 사랑은 하난데.’

꼭 여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 어떤 사람은 명예, 어떤 사람은 꿈, 어떤 사람은 성공 등 매우 다양합니다. 이럴 때면 주님께서 나는 질투하는 신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그런 것들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갉아먹는다고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그렇지만 또 마음 한 구석에서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돈도 많이 벌어서 주님을 믿으면 주님께서 잘 이끌어주시고 또한 그런 힘으로 더 많은 선교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갈등 끝에 주님을 좋아하지만 적당히 술도 마시고, 여자도 쳐다보고, 권위적인 모습도 부려보고, 부자인 척 해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마음 한 편에서는 이런 미지근한 자세로는 주님을 절대로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믿음이 그런 것을 조금이라도 더 끊어보려는 노력으로 이끌어갑니다. 어정쩡한 모습이 더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도 이런 양극단에서 왔다 갔다 하며 신앙생활을 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라라랜드란 영화에서 다루는 내용은 사랑이냐, 꿈이냐란 주제입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두 사람 다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째즈카페를 차리는 것이고 한 사람은 배우로 성공하는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꿈을 이룹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룬 장소에서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한 모습으로 만나게 되며 영화는 끝납니다. 둘이 헤어지게 된 이유는 한 사람이 상대자가 자신의 꿈을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는 것 같은 서운함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상대의 꿈을 밀어주지만 결국 그것이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위해 꿈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인가?’

저는 그래야 한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완전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꿈이 자신과 하나가 되어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만다는 사람은 자신의 걸림돌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돈이 있으면 이웃을 더 도와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돈을 좋아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이 좋은 것이지 남편 자신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 돈을 더 이상 벌어주지 못할 때, 혹은 병원에 입원해서 돈만 들어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아내는 힘들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어느 날 길에서 거지의 구걸을 받았습니다. 돈을 주고 싶어 주머니를 찾았으나 그날따라 동전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는 거지에게 미안한 말을 전했습니다.

형제여, 마침 한 푼도 가진 것이 없으니 정말 미안하오.”

그러나 거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돈이 문제입니까?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훨씬 값진 것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으니까요.”

 

만약 톨스토이가 돈이 있었다면 돈을 주며 형제라고는 말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주며 스스로 만족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고 영적인 것입니다. 사랑이 순결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묻은 모든 때를 벗겨내야 합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피조물입니다. 피조물과 하느님은 같은 수준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에 대한 애정은 참 영적인 사랑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사마리아 여인에 관한 내용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유독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셨을까?’

당연한 대답은 아마도 그 사람이 가장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가장 잘 되어있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될 수 있을까요? 물을 좀 달라고 하는데도 떠 주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주시려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인 성령님에 대해 말씀을 하실 때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이 여인은 삶에 지쳐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물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하시자 그런 물이라도 있으면 달라고 합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줄 많은 물을 찾았지만 갈증만 더 심해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성령님을 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여자는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대답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던 대답이었습니다. 성령님은 참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려는 순수한 사랑,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그 성령님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여인은 남편이 여섯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자신을 만족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신 말씀은 네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남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과 한 몸이고,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잃으면 자살을 해 버립니다. 자신을 잃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겪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과 하나인 사람에겐 참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순수한 사랑이신 성령님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과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애정을 끊는 것이 참 예배의 시작인 것입니다.

 

중국 한 금은방에서 한 젊은이가 금품을 훔치다가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정말 희한한 것은 그가 도둑질을 할 때 그 가게 안에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있는데도 어떻게 도둑질을 할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 젊은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때는 금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십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좋아하면 그 세상 것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용하는 하느님은 우상이 되십니다. 구약의 금송아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어야만 하는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카나의 혼인잔치 때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포도주를 만들어달라고 청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무언가를 청한다면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감소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청하면서 동시에 당신만을 사랑해요.”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돈을 청하면서 주님만을 사랑해요.”라고 고백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포도주가 없구나!”라고 사실만을 전달하십니다. 나머지는 예수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온전히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이미 그만큼 예수님에게서 시선이 떠나있는 것입니다.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와는 아담을 바라보지 않고 선악과를 바라보았고, 아담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와를 바라보았습니다. 순결한 사랑을 위해 사마리아 여인처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좋아하고 애정이 가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인 성령님을 충만히 부어주실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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