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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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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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2-21 ㅣ No.110247

 

2017년 2월 21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제1독서 집회 2,1-11

1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2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3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4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5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6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7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8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너희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9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

10 지난 세대를 살펴보아라.

누가 주님을 믿고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을 경외하면서

지내다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누가 주님께 부르짖는데

소홀히 하신 적이 있느냐?

 11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 주신다.

복음 마르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

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제 칠판에는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쭉 적혀 있습니다.

 혹시라도 잊어버릴까봐

그래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까봐

적어 놓은 이유도 있지만,

예전에 실제로 강의부탁을 잊어버려서

약속 날에 가지 못했던 잊고 싶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항상 일정을

이렇게 적어 놓고 점검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쭉 적어 놓다보니

항상 해야 할 일이 많고,

또 바쁘다는 생각을

 간직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책에

집중해서 읽게 될 때에도,

좋아하는 스포츠 경기를

보고 있을 때에도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라면서

알 수 없는 걱정과 죄책감에

 빠질 때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걱정과 죄책감 속에

 빠지면 어떨까요?

좋아하는 책 읽는 즐거움이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응원하는 팀의

스포츠 경기를 봐도

재미있지 않습니다.

 즉, 스스로 즐거움을

끊어내면서 현재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저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즐거움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도,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라는

 걱정과 죄책감으로 늘

불안하고 초조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특히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죄책감에 빠지게 되면,

할 수 있는 것들도 자신 있게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즐겁고 기쁘게

일을 했을 때에

자신감도 넘치게 되고

이로 인해 능률도 배가 됩니다.

그런데도 능률을 반으로 줄이는

그러면서 행복하지 못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에 얼마나

자주 반복하고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의 죽음에 관한 예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곧 우리의

구원으로 이끌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간적인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알아듣지 못하고,

 정말로 예수님의 죽음이

일어날까봐 걱정이 되고

두려워서 묻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죽음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는 바로 세상의 관점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이런 마음은 뒤이어

나오는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라는 논쟁을 통해 알 수가 있지요.

그들은 큰사람, 첫째 자리,

 높은 곳이 최고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

 주님의 기준을 도저히

따를 수가 없어서 걱정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귀영화만을 추구하려 한다면,

쓸데없는 걱정과 죄책감에

빠져서 주님을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고,

아무런 힘도 없고 미성숙해 보이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주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고 합니다.

세상의 기준을 떠나 주님의

기준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세상을 보다

더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

(마크 트웨인)

제 칠판입니다.

"소금 같은 사람"

(‘따뜻한 하루’ 중에서)

바닷물에는 보통 3%의 정도의

염분이 있습니다.

예컨대 3이라는 소금을 만들려면

97의 물을 증발시켜야 합니다.

 이런 소금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만약 소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생선을 절이거나 김치를 담을 때,

혹은 나물을 무치거나

국을 끓일 때도 음식의 조화로운

맛을 내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금은

자신을 가만히 녹여냅니다.

 소금은 자신을 낮추고

다른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기에 음식이 맛깔스럽게 됩니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더라도

주연 배우에게 관심이 집중됩니다.

그러나 주연배우 한 명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연배우와

스태프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멋진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어디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1등에만 관심이 있지만

그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드러내지 않고

열정을 녹여내는 수많은 조연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소금 같은'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소금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주연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소금같은 사람이 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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