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갈증> 송영진 모세 신부

스크랩 인쇄

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7-03-19 ㅣ No.110832

 

 

 

 

 


 

<갈증>

 

3월 19일의 복음 말씀은 요한복음 4장 5절-42절,'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입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는 남편이 아닌' 그런 사람입니다(요한 4,18). 아마도 분명히 그 여인은  자신의 복잡한 인생에서 비롯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고(요한 4,15), 인생의 많은 의문에 대한 답을 알려 줄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요한 4,25). 

 

(인생이 복잡해서 갈증에 시달리게 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갈증에서 벗어나려고 하다가 그렇게 인생이 복잡해진 것인지, 우리는 복음 말씀의 내용만으로는 확실한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어떻든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은총을 받은 일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라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인생의 갈증을 느낀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 갈증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데, 어떤 사람은 권력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재물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고...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더 큰 갈증을 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다 한 가운데에서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마시면 더 큰 갈증에 시달리는 것과 같은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책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속세를 떠나서 도를 닦는 등의 수행을 하고...그러나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자기가 무엇을 찾는지 모른다면, 또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지식은 쌓을 수 있겠지만 갈증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도를 닦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목적지를 모른다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정도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는 있겠지만...) 

 

여기까지 말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모든 답은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을 하려나보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길은 내가 찾는 길이 아니다. 그 진리와 생명도 내가 찾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답은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상투적인 선전으로 들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로 물어야 할 것은 "지금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가? 그래서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입니다. 우선 먼저 '희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가?"에 따라서('목적지가 어디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갈증의 원인을 찾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정답은 '영원한 생명'인데(요한 4,14), '생명'도 중요하지만 '영원한'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허무한 것을 추구하면 계속 허무해질 뿐이고, 갈증만 더 커집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면 언젠가는 그 '영원'에 도달할 것이고, 갈증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이라고 해도, 만일에 출세를 하기 위해서, 또는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또는 무병장수를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런 사람은 여전히 갈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더 큰 갈증에 시달린다면, 그것은 그런 것들만 바라는 사람들 탓이지 예수님 탓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예수님을 떠나버립니다(요한 6,66). 주시지 않는 것을 달라고 요구했다가 안 주신다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물어야 할 것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도 아니고, "더 많이 도를 닦아야 한다."도 아닙니다. 정답은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이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입니다. 

 

세종대왕은 예수님도 몰랐고, 복음을 들은 적도 없고,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도 몰랐지만, 백성을 위해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그분의 사랑은 거룩하고 위대한 아가페였습니다. 우리가 세종대왕 덕분에 성경을(하느님의 말씀을) 편안하게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해도 그분은 그리스도교의 어떤 위대한 성인 학자보다 더 위대한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라는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사랑은 하느님이다."가 됩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1코린 13장). 사랑이 있는 그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그곳이 천국이고 오아시스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그곳은 지옥이고, 갈증만 있는 사막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014년 사순3주일 말씀복사본입니다. 

신부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답니다. 기도해 주세요. 살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231 1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