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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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21 -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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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2-21 ㅣ No.110239




2017
02 21 () 가해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집회서 2,1-11
마르코복음 9,30-37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따로 가르치신 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유대교 전통이 가르치던 것과는 다른 가르침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그들 앞에 세우고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 예고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니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알고 예언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을 온전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겪을 미래의 일을 소상히 알지 못합니다. 그 사회의 권력자나 기득권층을 거슬러 말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정도는 알아도, 그것이 어떤 형태로 실현될 것인지는 모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복음서의 말들을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당신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계셨으면, 그분의 죽음은 참다운 죽음이 아닙니다. 잠시 죽는 시늉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죽음 후의 일을 모릅니다. 신앙인들은 죽어서 하느님에게 간다고만 믿고 죽어갑니다. 예수님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빌고, 그분을 부르면서 죽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사도신경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셨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죽음의 나라인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은 여느 인간의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당황하였습니다. 제자들이 그분의 부활을 기다린 흔적은 복음서들 안에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발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들은 믿지 않았고(마르 16,14), 예수님이 실제 나타나셨을 때도 그들 중 “더러는 의심을 품었습니다.(마태 28,17) 부활은 제자들이 기대하고 기다렸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씩이나 예고하신 것으로 기록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당신을 내어주고 쏟으신’ 결과였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들은 성찬을 거행하면서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될 무렵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이 우연히 체포되어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당당히 십자가를 향해 가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내어주고 쏟는 사랑의 삶을 사셨고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요한 13,1) 결과가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그분이 당신의 죽음을 세 번씩이나 예고하신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 다음에 나오는 것이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린이 하나를 안으시면서 어린이를 받아들여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대 어린이는 보잘것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세상에도 섬김은 있습니다. 우리는 높고 강한 사람을 섬깁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고, 병사가 상관을 섬깁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깁니다. 그것은 약자가 강자의 그늘에 살면서, 강자의 권력과 재물의 혜택을 받으며 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권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높은 권좌에서 군림하며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양식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권력자가 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은 자비와 사랑에 전능하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자비로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자비와 사랑에 상대방이 보답할 것을 기대합니다. 하느님은 보답을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어린이를 등장시켰습니다. 어린이는 보답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한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런 보답이 없는 곳에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길입니다.

교회는 이 섬김과 더불어 발족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오셔서 교회가 발족하였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협조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가르친 섬김을 생각나게 하고 실천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섬김 혹은 봉사라는 단어는 교회 안에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신분의 서열이 있습니다. 과거 로마제국과 유럽 봉건사회에서 얻어온 권력과 지배를 상징하던 신분개념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른 복장과 호칭들입니다. 그런 것이 유령과 같이 교회 안에 아직도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 것에 짓눌려버린 성령은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 안에 살려내지 못하시는 것같이 보입니다. ‘꼴찌가 되어’ 섬겨야 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교회 안에 실천으로 살아나지 못하고, 창백하게 퇴색된 문자로 성서 안에 남아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바를 우리 안에 다시 살아나게 하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우리는 세례와 견진에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꼴찌가 되어’ 섬기겠다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욕심에 짓눌려 죽어 계시지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약자 앞에 무자비하면서 이웃에 대한 우월감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면, 우리는 ‘꼴찌가 되어’ 섬기는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야 합니다. ‘모든 이를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나야 합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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