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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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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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6-25 ㅣ No.112841

 

2017년 6월 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제1독서 신명 30,1-5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복음 마태 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매년 6월이 되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찾는데 통일/

통일이여 어서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입니다.

아마 이 노래를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은 어른은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학창시절에 계속해서

불렀던 노래였지요.

그런데 이 노래는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625전쟁 이후 남과 북의 분단이

계속되면서 만들어졌을까요?

아닙니다. 이 노래는 1947년,

그러니까 해방을 맞고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에

발표된 노래입니다.

당시 남북의 분단이 기정사실

되면서 빨리 통일이 오기를

열망하며 만든 것입니다.

이 노래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정말로 통일을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잃은

설음으로 오랜 시간

 아픔 속에 있었는데,

같은 민족끼리 남과 북으로

갈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통일을 간절히 원했겠습니까?

그리고 이 간절한 통일이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간절함이 아직도

70년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과연 오랫동안 염원했던

통일은 언제나 이루어질까요?

정말로 불가능한 일일까요?

글쎄요.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쉽지 않은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특히 좀처럼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들이 모여서

우리나라의 통일을 더욱 더

멀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가족에서, 직장에서, 교회 안에서,

평범한 일상의 삶 안에서 우리들은

 나와 다른 이들을 다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틀렸다면서 거부할 때가 많습니다.

틀렸다고 거부하는 순간에 거리감은

절대로 가까워질 수가 없지요.

정말로 틀렸을 경우에도 ‘틀렸다

’라면서 인상을 쓰면, 괜히

거부감이 들고 가까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인

가족에서부터 뿌리박힌 이런

모습이 민족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집니다.

즉, 무조건 틀렸다면서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통일이

가까운 일이 될 수 있을까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일흔 일곱 번 용서하고,

그 다음부터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조건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는 상대방에 대해

틀렸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틀림 역시

나와 다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줄 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함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나 혼자만의 기도가 아니라,

함께 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모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들이 모여

진정으로 원하는 통일도

아주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어떤 일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탈 벤 샤하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위 아래 위 위 아래"

(최현정, ‘빨강머리N’ 중에서)

한 번은 술자리에서 늘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과 비교하며 과욕을

부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위만 보면 어떡해. 밑을 봐야지.”
잠자코 있었지만 집에

돌아와서도 생각날 정도로

나는 그 말이 불편했다.
누군가와 비교당하는 건

분명 기분 나쁜 일이다.

엄마 친구 아들과 비교 당할 때마다

 “난 나예요! 남들과 비교하지 말라구여!”

 학창시절 우리는

부모님께 외쳐대지 않았던가.
그런데 나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는 건 기분 나쁘고

 못난 사람과 비교하는 건

 만족감을 준단 말인가?

그렇게까지 해서 행복을 발견한다면

그거야말로 좀 치사하지 않나?
난 미안해서 그렇게는 못하겠는데?
비교자체가 옳지 않은 것이지요.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나’라는

고유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제 갑곶성지에서는 혼배미사가 있었습니다.

행복하게 잘 사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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