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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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서하고 받는 일은 오로지 은총으로 /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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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식 [big-llight] 쪽지 캡슐

2017-08-17 ㅣ No.113960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늘 나라는 종들과 셈을 하려는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이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다. 그러자 그가 갚을 힘이 없자 그가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임금은 이 일을 알고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너의 빚을 다 탕감해주었다. 내가 자비처럼 너도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23-33)”

 

어쩌면 이런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에게는 너그럽지만, 다른 이에게는 모질게 대하는 경우가 없지 않으리라. 자신은 늘 다른 이들께 말을 함부로 하면서도, 막상 다른 이가 조금만 서운하게 대하면 큰 모독으로 받아들일게다. 자신은 남에게 늘 상처주면서도, 자신은 어떤 조그만 상처에도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 빚진 이들이다. 비록 크건 작건 간에, 누구나 다 그분께 갚아야 할 빚이 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하리라. 모두가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그것 때문에 하느님 뜻에 충실히 살겠다는 우리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끼리 결코 헐뜯고, 단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게다.

 

라삐들은 잘못하면 세 번까지 용서를 청하라 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예수님께 되물었다. 그분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끝없이 용서해야 한단다. 우리는 참으로 숫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숫자에 매이지 말라신다. 어쩌면 정작 우리가 베풀어야 할 그 용서는 단 한 번일지도 모른다. 그런 용서일수록 일순간 생긴 미움이 아닌 쌓인 미움이리라. 그러니 한순간에 용케 용서될 게 아니다. 의당 미움이 생긴 만큼의 세월을 기다려야 할게다.

 

옛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덕을 닦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희생하였다. 그 많은 하고 싶은 것을 참았고, 먹고 싶은 것을 절제했다. 그리하여 깨달음이 올 때까지 기다렸으리라. 용서도 마찬가지일 게다. 누가 뭐래도 용서는 그야말로 크나큰 덕이다. 기도하며 인내해야만 한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성령의 은총으로 함께하실 것이기에.

 

우리 죄를 하느님께 용서받는 것은 물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도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용서는 사랑의 구체적 행위이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준다. 마찬가지로 이웃 잘못을 용서하는 일도 평화를 가져다줄게다. 우리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자. 형제자매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렇다.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일,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도 모두 다 하느님의 은총없이는 가능하지 않을게다. 용서의 은혜를 그분께 청하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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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사랑,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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