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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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동엽신부(의심을 통해서 믿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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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9-12-07 ㅣ No.134382

 


의심을 통해서 믿음에 이른다.

"의심은 잘못된 것일까? 

의심이 신앙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일까?"
적당히 하는 의심은

그럴 수도 있지만
진지한 회의(懷疑)는

궁극적으로 더 큰 이해와

더 깊은 신앙에로 인도합니다.
또한 더 가까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성서 속의 위대한 인물들은

의심의 단계를 거쳐 더 깊이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한때 하느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것을 보고
그를 질책했습니다.
그런 괘씸한 생각을 하다니

부끄럽지 않느냐고

윽박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정작 믿음의 영웅으로

세워 준 사람은
믿음이 확고한 듯 행동했던

욥의 친구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의심하고

항변했던 욥이었습니다.
욥기, 전도서, 시편,

예레미야, 애가 등을 보면
인간들은 의심을 품고,

회의에 빠집니다.
동시에 하느님은 인간들의 의심,

회의, 탄원의 가치를 이해하고

계신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성서안에
이렇게 인간들의 의심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의심을

드러내는 이들 안에는
의심을 초월하는 믿음이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장 설리번 신부는
하느님께 대한 회의(懷疑)와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逃避) 자체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절대자로부터

도망치고 있다고

믿고 때 있을 때조차,
그리고 어떤 물질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그 욕구를

부지불식간에 억누르고

있다고 믿을 때조차,
실상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그 절대적인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부정(否定)과

회의(懷疑) 자체가
믿음에로 나아가는

절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그분을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것을

결정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떠날 사람은 떠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의심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있는

세례자 요한이 당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소식을

별것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셨습니다

(마태 11,3 참조)

또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이

메시아임을 의심하고,

당신을 철저하게 배반했던

베드로(루가 22,60 참조)

를 받아들여 주시고

교회의 기초로 삼아 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토마가 당신의

부활을 의심한다고 그를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실제로

보여주심으로써 토마의

의심을 해소시켜 주셨습니다.

(요한 20,25 참조)

물론, 예수님은 제자들이

의심이라는 고개를 넘어 굳건한

믿음에 이르기를 바라셨습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요한 20,27)

그러나, 예수님은 의심을 없애기 위해

조바심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결국 이긴다는 것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2)

이는 아무리 의심해도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진리가 의심과 무지의

속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의심 자체가 인간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일부러 의심에 머물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체념하는 것도

현명치 못한 처사입니다.

딜레마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4세기에 살았던 한 프랑스

수도사가 어떤 당나귀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당나귀는 두 개의 먹음직스러운

건초더미 사이에 있었습니다.

정확히 두 건초 더미

중간에 서 있었습니다.

당나귀는 양쪽을 번갈아 보았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습니다.

그런 상태가 계속 이어졌고,

결국 당나귀는 굶어 죽었습니다.

예수회의 설립자인 이냐시오는

수도자나 신자들이 허무감에

빠지고 신앙이 흔들리는 때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적인 절망의 원인을 찾아내고

치유법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든지 이냐시오는

똑같은 처방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슬픔의 시간에

결코 변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슬픔을 당하기 전에

또는 평안했던 시절에 지녔던

결단력과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항상 굳건히 서야 합니다."

이는 의심을 무방비 상태로

놔두면 슬픔이나 절망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냐시오는 의심이 자라나서

비탄의 시기에 빠지게 되면

어떠한 방법도 무력한 도구로

 전락하기 쉬우므로 아예

의심이 드는 초기에 영적인 조치를

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냐시오가 말하는 영적인

조치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묵상, 자기 성찰, 회개 등

 아주 평범한 방법들입니다.

언제나 가장 귀한 것은

우리 주변에 우리와 늘상 함께

하는 것들 가운데 있습니다.

-차동엽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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