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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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람 -성령이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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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damiano53] 쪽지 캡슐

2018-05-20 ㅣ No.120578

 

 

2018.5.20. 성령 강림 대축일, 사도2,1-11 1코린12,3ㄷ-7.12-13 요한20,19-23




성령의 사람

-성령이 답이다-



어제는 근래 보기 드문 쾌청한 날이었습니다. 엊그제 어둡고 무거운, 흐리고 비오던 날과는 너무 대조적인 말그대로 성령충만한 하루처럼 밝고 맑고 시원한 하루였습니다. 세기중 수사님과 나눴던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절망은 금물입니다. 기다리니 이런 쾌청한 날씨입니다. 남북관계가 활짝 개였나 했더니 또 잔뜩 찌푸린 어둡고 무거운 날씨같습니다. 기다리면 때가 옵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갑니다.”

“그렇네요. 구름 한점 없는 날씨네요.”


성령의 사람은 바로 어제 날씨처럼 쾌청하고 시원한 사람입니다. 변화하는 상황을 삶의 리듬으로 알아 환경의 변화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침착과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 승천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사랑의 선물이 성령입니다. 성령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성령충만한 삶보다 더 좋은 삶은 없습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오늘 성령을 선물하시고자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에 여러분을 초대해 주셨습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매일이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님 승천 대축일후 한 주간 내내 저녁성무일도시 성령을 청하는 찬미가를 노래했습니다. 성령을 청하는 성가를 부를 때마다 힘이 납니다. 위로받고 치유받는 느낌입니다. 


“창조자신 성령이여 우리 맘에 임하소서

 고귀하온 은총으로 모든 조물 돌보소서.”


무려 7절 까지 계속되는 아름답고 은혜로운 찬미가입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은 얼마나 흥겨웠으며, 성령강림부속가는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웠는지요. 화답송 후렴은 하루 내내 짧은 기도 노래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당신 얼을 보내시고/누리의 모습을 새롭게 하소서.”


영혼의 기쁜 손님, 마음의 달콤한 손님이 참 좋은 성령입니다. 우리 인류의 유일한 희망은 성령입니다. 성령을 통한 끊임없는 내적혁명의 회개로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믿는 이들의 영원한 꿈이자 소원입니다.


세상에 성령보다 더 반가운 사랑의 손님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부자가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자유롭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지혜롭고 싶습니까?


답은 성령 하나뿐입니다. 인생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의 성령 하나뿐입니다.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으로 바꾸는 성령입니다. 마음만 활짝 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선물이 우리를 참 행복한 부자로 만들고, 성령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며, 성령의 불이 우리를 정화하고, 진리의 성령이 우리를 참으로 지혜롭고 겸손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이 참 고맙습니다. 방금 부른 복음 환호송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마음을 활짝 열어 성령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오소서, 성령이요 믿는 이들 마음을 충만케 하시며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성령이 답입니다. 성령이 모두입니다. 누구나 마음만 활짝 열면 성령의 선물로 성령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티칸 뉴스는 지난 3월 ‘성령의 교황’이라 일컫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숨가쁘게 달려온 5년 여정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령의 경이로움 사이로 걸어 온 여정이었다!”


여러분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성령의 사람이,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누가 성령의 사람인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성령의 사람은 소통과 일치의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소통과 일치입니다. 불통과 단절, 분열이 죽음이라면 소통과 연결, 일치는 생명입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늘까지 오르려는 인간의 교만을 좌절시키신후 서로 다른 말을 쓰게 하여 세상에 흩어버린 바벨탑 사건입니다. 


마침내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바벨탑 사건이후 불통과 분열로 시달리던 사람들이 완전 소통과 일치의 삶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완전 새로운 세상으로의 탈바꿈입니다. 서두의 표현이 참 실감납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 앉았다.”


성령강림을 상징하는 실감나는 표현입니다. 성령은 함께 모인 공동체 전례 자리를 좋아하십니다. 똑같은 성령께서 이 거룩한 미사전례 시간 고요히 각 사람위에 내리시고 각 사람 마음을 위로하시고 치유하십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 소통과 일치를 이루어 주십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지방말로 듣고 있으니 바로 성령께서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만민의 보편언어, 소통의 언어가 사랑의 성령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참 신기하고 감사합니다. 바벨탑 사건의 징벌의 결과 불통과 분열의 인류 공동체가 마침내 성령강림으로 소통과 일치의 공동체로 전환됐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불통과 단절, 분열의 공동체를 소통과 연결, 일치의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로 만들어 줍니다. 하여 우리 모두는 성령의 사람, 소통과 일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은사와 공동선의 사람입니다.

도대체 세상에 성령의 선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제가 평생 매일 쓰는 강론도 순전히 성령의 선물입니다. 하여 쓰고 나면 저절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성령은 겸손과 가난으로 활짝 열린 사람들을 찾아 오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성령에 힘입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고백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받은 은사는 모두가 성령의 선물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충만해야 겸손한 마음으로 은사를 잘 알고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 쓰라 있는 은사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선익이 우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는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한 성령을 받아 한 몸 공동체로 살기 위하여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람마다 받은 은사가 참 다양합니다. 함께 한몸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라고 받은 성령의 선물이 은사입니다. 몰라서 교만이요 자기자랑이지 진정 받은 모든 것이 성령의 선물임을 깨달아 알 때 저절로 겸손과 감사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사람은 공동체를 아끼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매사 하느님의 시각으로,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는 사람이 공동선의 사람이자 은사의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셋째, 성령의 사람은 평화와 기쁨의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똑같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 두려움의 벽을 활짝 열고 들어오셔서 평화를 선물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참 반가운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의 벽이 평화의 문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답 역시 평화뿐입니다. 평화의 빛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세상에 이런 평화의 선물을 주실 분은 주님뿐입니다. 우리가 이웃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평화입니다. 주님은 거푸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우리를 ‘평화의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요셉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돌판아래 새겨진 성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우리의 원초적 정서인 두려움과 불안에 대한 답은 주님의 평화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성령을 통해 전달되는 평화가 우리 안의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합니다. 평화와 더불어 기쁨의 선물입니다. 


아무도 줄 수 없는, 만들어 내거나 살 수 없는 주님의 선물, 성령의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평화가, 기쁨이 없다면 참 허전하고 허무할 것입니다. 외롭고 쓸쓸할 것입니다. 성령의 선물 덕분에 우리 모두 평화와 기쁨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넷째, 성령의 사람은 사랑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용서의 사랑이 하느님다운 사랑입니다. 이 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성령이 용서를 가능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단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창조자 성령이라 하지 않습니까? 부지런하고 겸손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성령을 통해 계속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숨을 불어 넣어 생명을 주신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성령으로 용서를 받았으니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의무입니다. 밥먹듯이, 숨쉬듯이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사랑과 용서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참 부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 성령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령 강림 대축일 우리 모두에게 성령칠은의 선물과 더불어 성령의 열매로 우리를 충만케 하십니다. 


성령의 일곱까지 은사인 ‘슬기, 통달, 의견, 의지, 지식, 효성, 두려움’과 더불어 성령의 아홉까지 열매인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받았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부자는 없습니다. 인성교육에서 최고의 스승은 성령이심을 깨닫습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맘에 오소서. 위로자신 성령이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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