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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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강론."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아오스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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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숙 [moon6388] 쪽지 캡슐

2017-12-10 ㅣ No.116738

 

마르 1,1-8(대림 2 주일)

 

오늘은 대림 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고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한국주교회의에서 바오로 6세 교종의 [민족들의 발전] 반포 50주년을 맞이하여, 담화문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현안들인 사회의 쇄신평화’, 그리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에 집중하고자 하였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우리는 지금, ‘광야에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음성을 듣습니다.

광야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기에 홀로 자신을 마주하는 곳이요, 사방이 트여 있어서 어디 하나 숨을 데가 없으니 벌거벗고 자신의 실상을 낱낱이 확인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마저 침묵하는 무서움이 지배하는 곳이기에, 결국 침묵하시는 하느님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광야에서 들려올 위로의 음성을 전합니다. <2독서>에서 베드로는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이의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하느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을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을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4)

 

이는 회개하고 가만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증표를 보여라고 합니다. 그 증표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용서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결코 요한은 자신이 용서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곧 그는 용서하는 이가 아니라 용서를 준비할 뿐이며,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하나 선물로 주어지는 용서는 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단지 미리 주님의 길을 닦는 이일 뿐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분을 증언합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7-8)

 

여기에는 예수님께 대한 증언 세 가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첫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격을 만납니다.

사실, 타인을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이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보다 어리고 후배인데 인정한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주는 종의 자격마저도 없다고 말합니다. 본래 주인이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종이 그 신발 끈을 풀어주는 법인데, 요한은 그런 일마저도 할 만한 조격조차 없는 종만도 못한 부당한 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진정 알았기에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인정하는 자라야 할 수 있는 겸손입니다.

 

<둘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사실 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지만, 시점으로는 지금 입니다. 그래서 오신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는 미래가 아닌, 지금오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리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지금 오시는 분에게 집중시킵니다. 자신은 단지 그분의 길을 닦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 오십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셋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신원의 차이와 함께 사명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는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이미 받은 그 새로운 생명용서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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