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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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제3주간 목요일 독서묵상글 / 비유 요약판 (히브리 1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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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1-28 ㅣ No.144078

 

 

2021 1 28일 연중제3주간 목요일 독서묵상글 (공동번역)

 비유 요약판 

(히브리 10,19-25)

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서 우리는 마음 놓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입니다. 21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사제가 계십니다. 22 우리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나쁜 마음씨가 없어지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겨 깨끗해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23 또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분은 진실한 분이시니 우리가 고백하는 그 희망을 굳게 간직하고 24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 25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 더구나 그 날이 가까와 오는 것을 아는 이상 더욱 열심히 모이도록 합시다.


히브리서 記者가 계속해서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 또한 제물인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지루할 만큼 반복하여 율법과 형식에 대해서 깨고, 그리고 '은총'에 대해서 강조를 하고 있죠. 여기 보면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 성소는 지성소를 품고 있는 하느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죠. 성막의 성전에 구조를 보면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이렇게 들어오는 그런 모양으로 성전이 지어져 있어요.

창세기에 보면 카인 그리고 또 아담이 범죄 한 자들이 어느 쪽으로 나가요? 동쪽으로 나가죠? 동쪽으로 나가면서 계속 이게 저주의 현실로 가는 거고. 동쪽에서 다시 서쪽으로 이렇게 들어올 때 하느님이 계시는 약속의 땅으로 귀환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그냥 애굽에서 그렇게 광야 거쳐 바로 이렇게 뒤로 들어가도 되는데 일부러 이렇게 쭉 돌아서 요르단을 건너 동에서 서쪽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런 그림들을 그리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성전에 에제키엘서를 보면 성전의 문이 서쪽으로 갈수록 넓어요. 4척씩 넓어지죠? 동쪽으로 갈수록? 4척씩 좁아져요. 좁아지고 결국 지성소에 들어가는 그 문은 닫혀있다. 그래도 과언이 아니에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만 들어가는 거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내가 곧 문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게 성전의 문들을 설명하시면서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들이에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건 ...지성소에서 멀어질수록 문이 넓어져요 계속. 그 지성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인간의 죄를 상징하고 있는 그 법궤 안의 물건들을 이렇게 덮어 버리는거죠? 그 예수의 은총. 십자가 은총, 은혜가 지성소고... 그게 다 하느님 나라의 운영방식이며 또 삶의 원리죠. 여기서부터 멀어 진다라는 건 점점 율법주의가 되고 형식적이 된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넓은 문이라는 건 ...여러분이 얘기하는 것처럼 무슨 세상적인 욕심을 부리고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기복주의적인 어떤 그런 신앙에 머무는 게 넓은 문이 아니라 인본주의와 율법주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들의 어떤 제사의 행위 율법의 행위 이런 것들을 의지하는, 그 넓은 문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한테 이렇게 인정받고 또 그 어떤 평가를 받는 데 있어서 굉장히 그 사람들의 가치와 자존심을 높여줄만한 어떤 행위 그런 것들을 붙드는 거 의지하는 거... 이게 넓은 문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리로 뭐 가지 말라 그래도 열심히 가요 그게 넓은 문이라고요. 그런데 그게 힘들잖아요? 그게 비록 청렴하게 살고 가난하게 살고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훌륭하다 이렇게 평가를 받게 되면 사람들은 그 길을 가요. 그러니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고난의 길이 좁은 문이 아니에요. 얼마든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감수하고 넓은 문으로 간다니깐요? 그런 것들을 감내하고 참아내는 인간을 누구나 다 세상이 칭찬해 주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그리로 가게 돼 있어요. 그게 확실하게 보장만 된다면 당연히 그리로 갑니다.


좁은 문이라는 건 오직 예수만 의지하고 인간들의 모든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나 외모를 의지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힘들죠.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그 길을 못가는 거예요. 그러니 그 문, 그리고 여기(본문20) 보면 예수님이 살길이다 그러잖아요? 그 길이 예수님이 길이 되어줬는데 예수님도 'i am the way. 내가 바로 그 길이다' 거기 관사가 붙어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그 길' 하느님 나라로 이르는 생명나무 열매로 이르는 그 길! 내가 바로 그 길이다라고 얘기하신 그 예수라는 그 길 이외에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만을 의지하여 가야 되는데 이 인간들이 예수의 그 피 은혜만을 의지하는 게 너무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에 절대로 그 예수만을 의지하는 그 길을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자꾸 인간들의 어떤 행위나 이런 것들을 의지하여 그 인간들의 자존심을 챙기려고 하고 그러는 거죠.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24장부턴가? 마지막 때에 관한 예수님의 강화가 나와요. 제자들이 물어요. '마지막 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랬더니 뭐 '여러가지 징조가 일어날 것이고 거짓 예언자가 일어날 거다' 그래요. 그런데 거짓 예언자가 뭘 갖고 올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요. 그거는 성경을 표피적으로 본 사람들의 진단이고 왜 언급이 없어요


거짓 예언자가 올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를 대신다고요. 그게 거짓 예언자들의 가르침의 내용이란 말이에요. 어떤 비유냐면 첫번째 비유가 종. 불의한 종 주인의 것을 맘대로 썼던 그 종 말고 주인이 때를 따라 자기의 백성들에게 자기의 식솔들에게 먹을 걸 나눠주라고 종에게 시키고 갔는데 주인이 더디 올 줄 알고 먹을 걸 나눠주는 일을 하지않고 지 연락에만 관심을 가져서 술 먹고 두들겨 패고 이런 종이 하나 나오죠? 그랬더니 주인이 갑자기 들이닥쳐 갖고 넌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그래갖고 벌을 주거든요?

 

그 다음에 바로 나오는 비유가열 처녀의 비유예요 그 잠 잘자던 열 처녀(부러운 열 처년데...) 다섯 명은 등불을 다 준비했지만 다섯 명은 기름을 준비하고 다섯 명은 기름을 준비 안했다 그래요. 아 이런 걸 갖고 우리는 뭐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여러가지 기특한 업적이나 이런 거를 많이 쌓아서 예수님이 언제 오시든 그 공로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어야 된다라고 이렇게 이야기들을 하는데 거기보면 열 처녀가 다 자고 있었죠? 졸고 있었단 말이에요 열 처녀가..

그러니까 그 열 처녀 중에 '슬기롭다 지혜롭다' 라고 인정을 받은 다섯 처녀가 대단한 거 한 거는 없는 거예요 사실은.. 그런데 한 게 뭐냐면 기름을 준비한 거죠? 그럼 그 기름이라는 게 뭐냔 말이에요. 사람들은 성령이라고 얘기하는데 성령을 뭐 어떻게 준비를 합니까? 우리가. 그리고 나가서 나중에 그 어리석은 처녀 다섯이 가서 기름 사갖고 오잖아요. 그럼 성령을 막 사갖고 올 수 있는 거예요? 뭐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러니까 그냥 이해 안 가는 거는 싹 덮어두고 이해가는 만큼만 불안을 푸는 거예요 설교자라는 사람들까지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앞에 있는 종은 주인이 더디 올 줄 알았는데, 그 열 처녀 중의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신랑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그 시간에 올 줄 알았기 때문에 기름을 준비 안한 거예요 둘이 달라요 그렇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 앞에서 마지막 때를 뭐라 그랬냐면 '그 때와 는 아무도 모른다' 라고 얘기를 하고 이 비유가 나오는 거란 말이에요.

한 무리는 자기가 생각하는 그 때가 아주 더디 올거라고 생각을 했고 ....한 무리는 빨리 제 시간에 빨리 올 거라고 착각한 거예요. 그런데 뭘 했냐면 더디 올거라고 생각했다라는 건....나중에 주인이 올 때쯤 되면 내가 주인이 원하는 그 일을 하면 된다 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리고 빨리 올 거라고 생각한 이 여자들도...주인이 그 신랑이 올 때에 자기들이 그냥 (그들은 들러리잖아요 신부가 아니에요) 들러리들이 해야 할 그 일 고것만 하면 된다 라고 생각하고 그냥 있었던 거예요.

둘다 주인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냥 주인이 왔을 때 자기들이 해야 할 바 그 일만 하고 있으면 된다 라고 생각했다라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이게 율법주의라는 거예요. 그 주인을 사랑하지 않고 주인에게는 관심이 없는데 그 주인이 기뻐할 만한 일은 하려고 했던 이런 것들을 예수님이 지금 거짓 예언자의 가르침으로 지금 강화를 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비유가 달란트 비유죠. 달란트 비유는 뭐예요.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종들이 죽 받았단 말이죠.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만 '야 이거 갖고 이득을 안 남기면 우리주인이 나를 무지하게 혼낼텐데~?' 라고 하고 그거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감춰둔 거죠. 그러니까 '내가 혼나지 않기 위해서' 주인이 준 그걸 주인을 곡해하여 그냥 감춰둔 거예요. 나머지 종들은 주인이 그거 갖고 뭐 하라고 얘기 안했어요. 이득 남기라고도 이야기 안했고 그냥 주고 갔거든요? 그런데 장사를 했단 말이에요. 장사는 잃을 수도 있고 딸 수도 있는 거죠. 그런데 장사를 했다라는 건 나머지 그 종들이 그 주인의 그 은총에 자기를 맡겼다는 거예요. 주인은 이걸 잃어 버린다 할지라도 나를 해꼬지하거나 야단치지 않을 거라는 은총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체의 비유가 다 뭐냐면은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에서 자기가 해야 할 어떤 율법적인 행위만을 하는 그런 것들이 마치 올바른 신앙생활인 양 착각하고 의도한 그런 자들 주인에 대해서 관심도 없는데 들고 있는 등불 이거 뭐예요. 그거는 계속 탈 수 없는 등불이라는 거예요. 들고는 있지만 그 예수라는 기름이 없는 자들의 등은 반드시 꺼지게 돼 있다는 뜻이에요.


여러분 정말 이 시대가 죄 덩어리이며 자기가 정말 얼만큼 큰 엄청난 죄인인가를 알지 못하는 그 상태에서 예수를 붙들고 있고 어떤 일들을 행하고 있다라고 하는데 진짜 그 예수를 기다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말 그 예수님이 사랑스러우십니까? 아니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 보잔 말이에요 우리가. 진짜 그 예수님이 기다려지세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이 피이거 밖에는 없다라는 것을 너무도 명확히 알고 있어요. 그럼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는 건 세상이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내 정체에 대해서 모르는데 무슨 세상이 나를 왜 미워하나.. 막연했거든요? 그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가 율법주의고 인본주의잖아요. 그리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그것들을 깨기 시작하니까 세상과 이 예배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공히 같이 반기를 들어요. ~

그러니까 실감이 나는 거예요. 아 이게 환란이었구나 이게 고난이구나..라는 게 실감이 나요. 여러분이 각자의 자리에서 그렇게 신앙인다운 소위 성화주의가 이야기하는 신앙인다운 삶을 살면 세상과 온 교회가 다 여러분을 칭찬해 줍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이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그 은총에 집중하고 예수가 높아지는 삶을 살게 되면 (내가 죽었다 라는 죽은 존재라는게 밝혀지고 폭로되고) 여러분이 일단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뿐만이 아니라 '잘못 가고 있다'라는 질타를 반드시 받게 돼요.

 

저는 이제는 뭐가 신앙생활이고 뭐가 복음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것 같아요. 너무 이제 명쾌하게 글쎄 하느님이 깨닫게 해 주셨어요. 분명히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각자의 자리에서 그러한 좌우로 상하로 우겨쌓임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그때는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예수의 십자가를 절대 놓으면 안돼요. 하느님은 마지막까지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 낱낱이 폭로해 내시는... 그 일을 하고 계시더라는 거죠. 제가 거기서 알았어요. ~ 자기부인이라는 건.. 내가 이 역사 속에서 죽어가는 게 아니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여러가지 그 인간들이 합의하고 정의해놓은 그 죄의 세목들. 이런 것에서 하나하나 죽어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걸 자기부인이라고들 지금 이야기하잖아요 지금. 하고 싶은 거 안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점점 안 해 가는 것. 이걸 성화라고들 하잖아요

여러분 이걸 하나하나 내가 죽여 가잖아요? 이걸 자기부인이라고 하는데 그러면은 하나하나 죽여 가면서 세워지는 또 다른 '' 가 있어요. '이거 안하는 나' '하느님과 하나인 나!' 인간들은 그렇다 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진다 그러고 나를 부인한다고 하는 그 하나하나의 삶을 이를 악물고 살아 내면서 한 편으로 또 다른 나를 끊임없이 세우고 있는 거예요. '기특한 나~!'

자기부인이라는 건 나는 죽은 자네요라는 걸 아는 거지 조금씩 죽어가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것만 확실하게 알고 가도 예수의 십자가만 꼭 붙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나는 매일매일 조금씩 부인되어지고 죽는 게 아니라 이미 죽은 자일 수밖에 없다 라는걸 아는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이미 하느님이 나를 부인시키고 예수로만 봐 준다 라는걸 아는걸 자기부인이라고 하고 십자가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예수와 화목해야 됩니다. 도대체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도 '' 이야기하면서 왜 우리에게 상이 없냐구? 찾아 갔더니 얘기 좀 합시다 이러냐구요. 도대체 그동안 얼만큼 설명을 했는데..아직도 왜 상이 없냐구? ''이라는 단어 자체가 여전히 그 상의 주인이 '' 잖아요.

여러분 어떻게 그게 예수 믿는 사람입니까. 상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아니 어떻게 그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가서 '하느님 정말 하느님이 모든 걸 이렇게 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하느님을 찬송할 수 밖에 없네요'라는 그 찬송을 어떻게 하겠냐구요 그 사람이. 나는 상받을 '꺼리' 를 갖고 왔다라고 요만큼 이라도 갖고 온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찬송하겠냐고.

그런데 왜 상이 없다 그러냐구 그 난리를 치구.... 어떤 상을 받고 싶으신 거예요 도대체가. 그렇다면 주 예수와 함께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거 다 거짓말이었던 거예요? 주 예수와 함께라면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런데 상을 받겠다라는 건 주 예수와 함께라도 내가 불편한 곳은 안 가고 싶다 이거 아니에요?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도 심지어 '상이 없다' 그랬다고 이단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니 참. 어디까지를 당췌 어디에서 멈춰야 되는 건지를 도대체가.....

여러분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안다면 그리고 이 역사가 도대체 뭘 하다가 돌아가야 하는 것인지를 우리가 안다면 이 죽은 흙인 내가 저주받은 땅에서 뭘 상 받을 꺼리로 붙들고 하느님 앞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 어떤 게 도대체 그렇게 가치 있어요? 우리가 하는 일중에 정말 그렇게 가치있어 보여요?

우리의 행위가? 난 아무리 생각해도 내 안에서 나오는 건 진짜 죽은 흙의 행위 밖에 없는데 도대체 어떤 행위들을 하길래. 어떤 삶을 그렇게 살고들 계시길래 '' '' 하는지 모르겠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가 사랑스럽지 않으니까 여전히 이 세상 속에서 남들 바라보고~ 교회 바라보고~ 자기소유 자기자식 이런 거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가 사랑하는 이가 계신 그 곳~ 반드시 내가 그 분을 사랑하면 그 분이 계신 곳에 관심을 갖게 돼 있어요.


여러분. 예수께 가는 길. 하느님께 가는 길은 옛 휘장이신 예수가 찢겨짐으로 말미암아 징검다리가 되신 그 예수의 은총’, 이외에는 그 피 보혈밖에는 없어요. 그 예수의 은총을 생각하세요. 그 예수의 보혈 그거 입고 가면 그냥 하느님께서 '아이고 내 아들..' 해 주신다니까요. 그걸 '믿음' 이라고 하는 福音, 복된 소식이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왜 여전히 짐을 지고 계시는 거예요? 벗으세요. 십자가 앞에 내려 놓으라고 그러시잖아요.

여전히 뭘 여러분이 해야 하느님이 기뻐하실 거라고? 그럼 그 하느님이 여러분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내 새끼는 그냥 나만 열심히 의지하면 되는 거예요. 그 아빠만 의지하고 오라니까 껌 팔아갖구 그냥 몇푼 되지도 않는거 가져와서 '아버지 가계에 보탬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이러구 앉아있구.

그런 거는 하느님 앞에 아무 쓸모가 없어요. 그냥 하느님이 살게 하시는 걸 여러분이 열심히 살다 가면 돼요. 착하게 살게 하시면 착하게 살다가 그러다 한번 욱하다 터지면 거기서 또 배우고. 또 하느님이 그렇게 아들의 목숨까지 끊어가며 미워했던 죄 함께 미워도 해보구,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그 속에서 또 허우적거리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예수의 恩惠로 그런데 그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이 '율법과 예언서'는 성경이죠? '聖經'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하느님을 네 목숨처럼 사랑하라가 '율법과 예언서' 잖아요 그러면 또 다른 곳에서 예수님이 '율법과 예언서' 라고 얘기한 데가 있는데 거기가 뭐냐면 '네가 대접받기 위해서 남을 대접하라' 그러죠. 이게 '율법과 예언서' 예요. 그러면 대접받기 위해 남을 먼저 대접하는게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거죠? 이게 성경이 얘기하는 바예요.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란 말이죠. 근데 '율법과 예언서' '성경' 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바는? '예수' 예요 '나에 대해서 기록한' 그러면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거는 누구의 이야기예요? '예수이야기' 라는 거죠.

생각해 보란 말이에요.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죽기까지. 필립보서 2장에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했다 그러죠.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우리가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웃이 누구라고 그랬어요 예수님이?. 니들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고 '내가 너희들을 이웃삼아... 내가 너희들을 사랑해줘야... 너희들은 비로소 살 수 있는 존재야' 라고 이웃의 개념을 바꿔 주잖아요?

그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니 이웃을 니 몸처럼 사랑하라''()' 가 누굽니까? 예수! 란 말예요. 그 분이 우리에게 '아 예수님이 그렇게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시켜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거군요?' 라고 이렇게 대접을 해 주기를 바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먼저 대접해 준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또 그걸 '율법과 예언서'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이 이야기를 짐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래서 그 종처럼 또 기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처럼 형식적으로 사랑한다..사랑한다..그러구 무슨 예수를 사랑하냐구요 우리가?.. 자기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도 모르는 이가 어떻게 무슨 예수를 사랑하냐구요.

 

형제를 사랑하라 형제는 누구라고 그랬어요? 친구를 사랑하라. 친구는 누구라고 그랬어요? 아니 자기 친구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형제이고 친구라며! 우리 그게 되냐구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릴 위해 죽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친구라 했다 그러잖아요. 그러면 그 형제사랑 친구사랑은 예수가 한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그 예수가 그렇게 사랑하셔서... 하느님을 사랑하시고 이렇게 이웃된 나! 형제된 나! 친구된 나! 를 그렇게 목숨걸고 사랑해 주셨다!라는 걸 알았을 때.. 이 육신이 이제 바뀌게 되면 그 하느님을 목숨 걸어 우리도 사랑하게 되고 날 그토록 사랑해 줬으니깐. 그 예수!를 내 이웃인 유일한 이웃인 그 예수를 당연히 사랑하게 되죠.

그러면 '서로 사랑하라' 라는 게 뭐예요. 사랑을 내 놓아라 라는 거 잖아요. 니 안에 있는 사랑을 내 놓아라. 그게 '사랑하라' 잖아요.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라고 했으니까 내 안에 그 '예수' 가 있을 때 그 예수를 내놓는 사람들끼리 사랑이 되는 거고 이들이 형제이며 이들이 이웃인 거란 말입니다! 이들이 가족!이란 말예요. 그런데 우리 안에 그 예수가 있냐구요! 전부 뭘 한 종교행위 신앙행위 무엇을 한 '' 밖에 없잖아요 내 안에...우리가 무슨 예수를 사랑하냐구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내 안에 '사랑''예수' '하느님' 이 없는데.....

 

고린도전서 13장 보세요.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다 뭐예요? 하느님은 오래 참으시고 하느님은 온유하시며 하느님은 자기유익을 구치 않고.. 우리는 전부 '자기유익'만 구하잖아요.

그래서 창세기에서도 할례를 행한 그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바로 이어서 18장부터 나그네를 대접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아무나 그 나그네를 대접하여 지나가는 홈리스(거지)들한테 있는 돈 맨날 다 털어주고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

그 나그네를 대접한 이야기를 히브리서에서 뭐라 그래요 11장에서? '믿음으로' 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하느님인 줄 알아서가 아니예요! 왜 그런 이야기를 거기다가 넣어 놨냐면 그가 그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이었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하느님의 할례라는 게 뭔지를 보여주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했는데도 바로 그 이야기 가운데 사라와 아브라함이 또 천사의 말을 듣고 비웃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란 말예요. 아니 하느님이 누군지를 알고 대접을 했으면 또 비웃는게 맞아요 그게?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하느님이 우리를 대접하러 오시는 거란 말입니다. 그 대접이 뭔지를 모르는 자들이 '소돔과 고모라' 고요. 그래서 그들이 나그네를 대접 안하는 걸로 연결이 되는 거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나그네로 오셨는데 자기 백성들이 영접지 않더라' 그러지요.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는다 라는 거 자체가 우리를 나그네로 대접하신 예수를 안 믿는다는 이야기라니깐요? 이걸 표피적으로 보면 전부 그런 게 되는 거예요

나그네를 대접해야지~ 이웃을 사랑해야지~ 형제를 사랑해야지~ 도대체 뭐가 사랑이에요? 중들도 하는 그런 사랑을 성경이 우리에게 하라 그러겠냐고요. 그 사람들이 더 잘하잖아요. 이슬람교인들도 하는 그 사랑을 우리보고 하라 그러겠냐고 성경이. 뭘 고민을 해 봤어야 설명을 해도 이해를 가지 이게, 그러니까 엉뚱한 이야기들만 듣구 그냥 부화뇌동하는. 여러분 예수를 믿으십시오. 십자가를 믿으세요. 하느님의 백성은 반드시 그리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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