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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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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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5-19 ㅣ No.120561

 


2018년 5월 19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 28,16-20.30-31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갔을 때,

바오로는 자기를 지키는

군사 한 사람과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7 사흘 뒤에 바오로는

그곳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모이자

바오로가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백성이나

조상 전래의 관습을

거스르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예루살렘에서 죄수가 되어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졌습니다.

18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19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20 그래서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30 바오로는 자기의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였다.

31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복음 요한 21,20-25

그때에

20 베드로가 돌아서서 보니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24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 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덩치가 큰 누군가가
제게 달려오는 것입니다.
 “오지마세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저의 이 다급한 말에도
불구하고 이분은
멈추지 않고 다가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손으로 오시는 분을
막아설 수도 있겠지만
저는 급한 마음에 발을
힘껏 내밀었습니다.
너무 세게 쳤는지 발이
 너무나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저는 잠에게 깼습니다.
무슨 일이었을까요?
맞습니다.
꿈이었습니다.
제게 힘차게 달려온다고
생각했던 것은 침대 옆의
 벽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벽을 향해
돌려차기를 한 것이었지요.
그 결과 제 발가락에는
 피멍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피멍은
누구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침대 옆의 벽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바로 저 때문입니다.
아마 벽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이를 벽이 다가오는 것이라고
착각했었나 봅니다.
분명히 벽이 커다란 사람으로
다가온다고 생각했기에
그 순간 너무나 무서웠고
스스로를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에 했던 행동이지만
 스스로 자해를
한 셈이 된 것이지요.
잠결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깨어 있는 지금의
현실 세계에서도
그랬던 적이
참 많지 않나 싶습니다.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생기는
어리석었던 모습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남을
받아들이지도 또한 따뜻하게
 포옹해줄 수 있는
여유는 없습니다.
바로 내가 맞고 남은
 틀리다는 생각에 올바른 길이
아닌 잘못된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에 대한 판단은
잠시 미뤄두고 대신
내 자신이 해야 할 올바른 일,
사랑의 행위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베드로가 주님께
요한을 가리키면서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로
알려져 있었지요.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겪으실 때,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유일하게
예수님 곁을
 지켰던 제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금했었나 봅니다.
배반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했었던 요한의 미래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리고 계속해서
 “너는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남에 대한 생각과 판단을
 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집중하고 계십니까?
혹시 여전히 다른 이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내 자신에 집중하고,
지금 해야 할 사랑의 일에
관심을 두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모습입니다.

인생이 불행한 건

 대개 진짜 나를

감추기 때문이다.

(홍창진)


주님만을 따라야 합니다.

삼 일만

(‘좋은 생각’ 중에서)

“늘 새롭다. 모든 게 어제,

오늘, 내일 가운데에서

태어나고 늙어 가니까.

훌륭한 사람은 그저 이삼일

사는데 온 힘을 쏟는다.”
조선 시대 서자 출신

이덕무는 신분 차별을 겪으며

행복하게 사는 법을 터득했다.

어제, 오늘, 내일 삼 일만

신경 쓰는 것이다.
항상 많은 것에 신경 쓰는

 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에만

충실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순간만을 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덕무 선생님처럼

삼 일만 힘을 내보면 어떨까요?

멀지 않은 과거와 미래도

함께 하면서 지금을 분명

다르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 선생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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