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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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28 -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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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3-28 ㅣ No.111063




2017
03 28 () 가해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에제키엘서 47,1-9.12
요한복음 5,1-16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
걸어가라 >


예수님께서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서른 여덟 해나 들것에 누워서 앓고 있는 환자에게 물으셨다. 환자에게 이 말은 복음이다. 이 환자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건강해지고 싶은 것이 아닌가? 이 환자뿐만 아니라 베짜타라고 불리는 못 주변에는 눈먼 이, 절름거리는 이, 팔다리가 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왜냐하면 물이 출렁거릴 때에 그 못 속에 들어가면 혹시 병이 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 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병자들이 그곳에 모여 있고 물이 출렁거릴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누구나 환자라면 그곳에 와서 물이 출렁거릴 때를 기다렸다가 서로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이 제일 먼저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 희망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 모여 있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란 누구나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다. 희망이 없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인간이다. 어떤 사람도 나름대로 희망을 갖고 있다. 그 희망이 또 오늘을 살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나의 희망은 무엇인가? 나의 꿈은 무엇인가? 지금 나의 간절한 바램이 있다면 그 바램이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먼 이, 절름거리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들은 누구인가? 꼭 나으리라는 보장도 없이 어쩌다가 가끔 물이 출렁거릴 때 제일먼저 들어가는 사람만이 병이 낫는다는 불확실성을 가지고 그래도 거기에 모든 희망을 걸고 기다리고 있는 이 병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오늘날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주님을 보지 못하는 눈먼 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대로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걸어가지 못하고 절름거리는 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명의 양식을 먹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만 하여서 영양실조에 걸려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들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신자들의 모습이다.

병이 낫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못에 와서 언제 물이 출렁거릴 지도 모르면서 그 물이 출렁거릴 때만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병자들이 바로 오늘날 예수님이 아닌 다른 곳에 가서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고 그곳에서 열심히 생활하는 이들이다. 베짜타라는 못은 또한 율법을 가리키기도 한다. 옛날에는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율법에 얽매여서 오직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이들이다.

오늘날 베짜타라는 못은 복음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즉 병든 우리를 낫게 해주는 것은 복음이지 교회 건물이 아니고 신자라는 이름이 나를 기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35,10)라고 말씀하신 대로 생명의 샘인 말씀을 먹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단지 나의 병을 고쳐주시겠지 하고 형식적이고 수동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결코 일어나 걸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것은 말씀이다. 서른 여덟 해 동안이나 누워있던 환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한 것은 베짜타라는 못의 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었듯이 우리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는 것은 미사 참례를 하러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이 아니고 또 활동이 아니다. 정말로 우리를 치유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다섯 번이나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들것에 누워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들것에 누워있다는 것은 죽은 시체라는 말이다. 일어나라는 말은 부활하라는 말이다. 무엇이 죽은 이를 부활시키는가? 그것은 그가 누워있는 들것이 아니다. 그를 부활시키는 것은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던 말씀이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 걸어간 것은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이고 그가 그 말씀대로 따랐기 때문에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를 그 동안 누워있게 만들었던 들것은 무엇인가? 복음에서 말하는 들것이란 율법을 말한다. 율법은 결코 그를 일어나 걸어가게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이 그에게 들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들것은 여러 가지 일 수가 있다. 나의 고정관념, 나의 악습. 나의 잘못된 신앙생활, 악습, 게으름 등일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것에 얽매여 있어서 일어나 걸어가지 못하고 있다.

일어나 걸어간다는 것은 그런 모든 것을 버리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를 살릴 수 있고 병든 나를 치유시켜 줄 수 있는 것은 그리고 나를 부활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생명의 샘이신 말씀이다. 그 말씀을 먹지 않으면 그리고 그 말씀의 못에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치유 받지 못할 것이다. 일어나 걸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생명의 샘인 말씀의 못에 들어가려고 하지는 않고 치유시켜 줄 수 없는 베짜타라는 연못에 누워 낫게 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그렇게 신앙 생활해온 기간이 어느덧 서른 여덟 해가 되는 사람도 있다.

"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35,10)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일어나게 하는 것은 말씀이다. 제발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그 말씀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자. 아무리 말씀이 중요하다고 제가 누차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말씀으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또 서른 여덟 해 동안 누워지내야 할는지 모른다.

예수님은 오늘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다섯 번이나 말씀하신다.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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