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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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20 -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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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10-20 ㅣ No.115565




2017
10 20 () 가해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Friday of the Twenty-eighth Week in Ordinary Time

로마서 4,1-8 / 에페소서 1,11-14
루카복음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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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4,1-8

형제 여러분, 1 혈육으로 우리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 얻은 것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5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 6 그래서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7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8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


Reading 1


Rom 4:1-8

Brothers and sisters:
What can we say that Abraham found, our ancestor according to the flesh?
Indeed, if Abraham was justified on the basis of his works, he has reason to boast; but this was not so in the sight of God.
For what does the Scripture say?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A worker's wage is credited not as a gift, but as something due.
But when one does not work, yet believes in the one who justifies the ungodly, his faith is credited as righteousness. 
So also David declares the blessedness of the person to whom God credit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Blessed are they whose iniquities are forgiven and whose sins are covered.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does not rec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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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1,11-14

형제 여러분,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Reading 1


EPH 1:11-14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we were also chosen, destined in accord with the purpose of the One who accomplishes all things according to the intention of his will, so that we might exist for the praise of his glory, we who first hoped in Christ.
In him you also, who have heard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of your salvation, and have believed in him, were sealed with the promised Holy Spirit, which is the first installment of our inheritance toward redemption as God
s possession, to the praise of his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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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12,1-7

그때에 1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2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3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4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5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7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Gospel


Lk 12:1-7

At that time:
So many people were crowding together that they were trampling one another underfoot.
Jesus began to speak, first to his disciples, "Beware of the leaven
? that is, the hypocrisy ? of the Pharisees.

"There is nothing concealed that will not be revealed, nor secret that will not be known.
Therefore whatever you have said in the darkness will be heard in the light, and what you have whispered behind closed doors will be proclaimed on the housetops.
I tell you, my friends, do not be afraid of those who kill the body but after that can do no more.
I shall show you whom to fear.
Be afraid of the one who after killing has the power to cast into Gehenna; yes, I tell you, be afraid of that one.
Are not five sparrows sold for two small coins?
Yet not one of them has escaped the notice of God.
Even the hairs of your head have all been counted.
Do not be afraid.
You are worth more than many sparr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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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10 20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두려움은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감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격에 따라 두려움이 더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려움을 별로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 부정적 역할도 하지만, 그만큼 신중한 자세를 갖게 하는 긍정적 역할도 합니다.
여기서 더욱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늘 나라의 정의를 두려워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자세를 올곧게 붙잡아 줍니다. 반대로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고 굴복한다면, 그것은 비굴함과 비겁함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죽이는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고, 육신을 죽인 다음 영혼을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 자신이 오히려 세상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소통과 친교의 존재이시고,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가 되셨습니다. 우리 사이에 형제가 되어 오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 인간들 사이에도 형제애가 두터워지고, 복음의 기쁨을 “밝은 데에서”, 그리고 “지붕 위에서”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덕으로, 그리스도인은 위대하신 분을 두려워하고, 영원한 삶을 지향하며, 절대자이신 하느님과 소통하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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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0 14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
성 갈리스토 1세 교황 순교자 기념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진실은 언제나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비록 진실을 감추고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룩처럼 번져 가는 위선의 허울이 벗겨지고 진실을 밝혀낸다고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 모르는 편이 더 나은 경우도 있고, 감추는 것이 모두에게 평화로운 일도 있습니다. 숨겨진 자식의 비밀, 내 과거의 치부, 밝히고 싶지 않은 죄의 실체들을 내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실망하며, 분노에 이르는 좌절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경계하라고 하신 것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죄스러운 실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애써 감추려는 위선의 행위들이 결국 자신의 양심을 무디게 하거나, 죄를 합리화하는 유혹에 쉽게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나를 무시하고 외면할 세상의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성령의 인장’을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인장’이란 내가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지만, 가슴을 치며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겸손한 죄인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는 은총의 표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예수님의 위로는, 바리사이처럼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지 않는 한 하느님께서 나약한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받아 주신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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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 16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성녀 헤드비제스 수도자 기념일)
(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동정 기념일)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하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는 마태 13,33을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에서 누룩은 거의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누룩은 반죽 안에 골고루 퍼져야 합니다. 반죽 어느 곳에서도 누룩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누룩을 넣었을 때와 넣지 않았을 때의 모습은 천양지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위선은 누룩과 닮았습니다. 좋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선한 일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위선이 되겠지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을 비난하시는 것은 그들이 계명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지향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오늘 독서에서 지적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켰기에 “당연한 보수”로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기들이 행한 업적을 자랑했습니다. 이러한 마음 자세가 그들의 행위를 변질시켰지요.
혹시라도 우리의 착한 행동에 나쁜 누룩이 스며들고 있지는 않는지요?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행동을 가장하여 의인인 척하는 사람보다는 어리석어도 정직한 죄인을 더 사랑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기 때문에,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린다면 한 마리는 거저 덤으로 팔리는 것인데, 그렇게 팔려 나가는 참새마저 기억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사정을 구체적으로 면밀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나의 벗’이라고 말씀하시니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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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0 17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 교회가 기리는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교부입니다. 그의 자세한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요한 사도의 제자이자 어린 시절 예수님을 직접 뵈었던 인물이라는 전승을 보아도 초대 교회가 그를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가 안티오키아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는 고초를 당하면서도 들르는 곳마다 신자들에게 보낸 ‘일곱 편지’는 교회사적 가치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깊은 감동과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소중한 신앙의 유산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합창단이 되십시오. 그래서 화합하여 조화를 이루고 일치하여 하느님의 곡조를 받으면서, 한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 노래를 불러 드리십시오.” 에페소의 신자들에 대한 이냐시오의 이 유명한 말씀은, 그가 목자로서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위하여 얼마나 열정적으로 헌신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또한 겉치레에 마음을 쓰는 대신 사랑과 믿음을 통한 고요함 속에서 참된 존재 안에 머무르도록 격려하며 이렇게 가르칩니다.
“말로 주님, 주님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있지 않기보다는 말없이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지니고 있는 이는 그분의 침묵까지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완성되고, 말한 대로 행할 수 있으며, 침묵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순교를 눈앞에 둔 이냐시오가 로마의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난 그의 강한 신앙과 용기가 큰 감동을 줍니다. 그는 ‘맹수의 이빨에 갈리는 그리스도의 밀알’이 되는 순교의 고통 속에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인’이 될 것이며, 학대 속에서 ‘이제 비로소 제자가 되어 간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또한 ‘제자가 되어 가는 길’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유혹 속에서 과연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할 것인지’를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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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10 18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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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10 19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십자가의 성 바오로 사제 기념일)



이웃에게 늘 불만투성이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마을 사람들처럼 비열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 자기 욕심만 채우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야. 모두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는지 모르거든. 그들은 영원히 다른 사람들의 결점만을 떠들어 대고 있을 거야.
우연히 그의 곁을 지나던 천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정말 그렇다는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저 사람을 보세요. 비록 그의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나는 얼굴을 잘 기억하고 있지요. 저 탐욕스럽고 잔혹한 눈을 보세요. 자신이 무슨 사설탐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쏘아보고 있잖아요.” 천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너무 잘 봤군요. 너무도 잘 알고 있군요. 하지만 당신은 아직 한 가지만은 파악하지 못하는군요. 그것은 당신이 지금 거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거울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헐뜯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데는 눈이 멀었습니다. 남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대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형식이나 겉치레에 집착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참으로 소중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리사이들이 빠진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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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014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
성 갈리스토 1세 교황 순교자 기념일)


자존감이 약한 사람일수록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자신의 내재적인 힘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나오는데, 이 힘이 약한 사람은 두려움을 안고 살기에 외적인 것을 붙잡고 집착합니다.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겉치레 형식이나 율법을 강조하는 데에는 그들의 낮은 자존감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엄하고 무서운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자존감이 약하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을 두렵고 무서운 분으로만 이해할 때 이 같은 현상이 생깁니다.
그러나 구약에 드러나는 하느님께서는 노여워하시다가도 사랑이 그지 없으시어 쉬이 뉘우치시는 분이십니다(요엘 2,13 참조). 이렇듯 이스라엘 백성이 수없이 하느님을 배신해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는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나는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너의 구원자이다’”(이사 43,1-3).
이것은 무릇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어 놓으시고 보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끊임없이 헤아리고 살면 우리의 자존감은 살아납니다. 외적인 것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며 겉치레 형식에 매달리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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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 15)
(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세상의 소금이며 빛(마태 5,13-16 참조)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소금이시며 빛이신 분께서 보잘것없는 우리 인간들을 보고 소금이며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코 소금은 짠맛을 잃을 수 없고, 빛은 어둠 속에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만일 짠맛을 잃고, 어둠 속에 갇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소금과 빛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시면서,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빛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그 빛을 차단하고, 짠맛을 거부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절로 부패해져 버렸습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이미 욕심과 위선에 둘러싸여서 반()하느님적인 언행을 일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한 마리의 참새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사람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분이십니다. 바리사이들이 자신들의 언행을 감춘다고 감추어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빛이시고 소금이십니다. 그러니 썩어 없어질 세상의 물질에 인생을 맡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우리의 온 생애를 의탁하는 참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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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 16)
(성녀 헤드비제스 수도자 기념일)
(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 동정 기념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기억하시는 주님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을 섬세하게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주님을 우리는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삶이 두렵다면 원인을 찾아봐야 합니다.
습관일 수 있습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불안한 미래’를 연상하는 나쁜 습관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대비도 아닙니다. 오지 않는 ‘비’를 미리 뛰어가서 맞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우산이 있습니다. 믿고 맡기는 자세입니다. 머리카락 숫자까지 기억해 주시는 주님께 ‘앞날’을 바치며 사는 것이지요
물론 쉽지 않습니다. 언제나 유혹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미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셔야’ 모든 미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분석하는 것은 여전히 어린이의 신앙입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을 반복해야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좌우하십니다. 한낱 미물인 참새까지도 그분의 계산 아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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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17)
(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참새는 흔한 새입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은 새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곳곳에 그런 새들이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새를 잡아 팔곤 했나 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한낱 미물인 참새도 주님의 허락 없이는 잡히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두 닢을 요즘 가치로 ‘이천 원’ 정도라고 해 봅시다. 그러면 참새 한 마리는 500원이 못 됩니다. 적은 금액입니다. 하지만 생명이기에 주님께서는 붙잡아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의 생명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이천 원’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돈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피로써 구원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두려움은 복음의 정신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공포를 조장하고 겁을 주는 믿음이라면 한 번은 점검해 봐야 합니다.
태양과 바람이 내기를 합니다. 누가 먼저 나그네의 겉옷을 벗길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바람은 거센 광풍을 일으킵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옷깃을 꼭 부여잡습니다. 하지만 태양이 열기를 더하자 나그네는 스스로 옷을 벗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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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19)
(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십자가의 성 바오로 사제 기념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당시 두 닢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무척 싼값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것까지도 주님께서는 기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어 두실 정도로 섬세하신 분이시라고 복음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주님이시지만 우리는 그분께 자주 불평합니다. 어찌하여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어찌하여 시련 속에 버려두시는지 원망하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유혹입니다. 한낱 미물인 참새까지도 잊지 않으시는데 그보다 훨씬 귀한 인간에게 어찌 관심을 갖지 않으시겠습니까?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자기중심적 믿음의 길을 걷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린이의 신앙을 탈피하지 못한 탓입니다. 어린이는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받지 못하면 무척 섭섭해합니다. 그러기에 주는 것에는 서툴기 마련이고, 주는 기쁨에도 익숙해져 있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으려고만 할 뿐 베풀 줄 모르면 늘 어린이의 신앙생활로 남습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은 어린이의 신앙생활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지 조용히 돌아봅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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