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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잊혀진 인물 정학초 서거 211주년 추모(2)[브레이크뉴스-2018-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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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pgu77] 쪽지 캡슐

2018-04-19 ㅣ No.215056

 

조선후기 잊혀진 인물 정학초 서거 211주년 추모(2)


박관우 객원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8/04/19 [09:37]

▲ 박관우 브레이크뉴스 객원 칼럼니스트. ©브레이크뉴스



지난 1회에서 정약용(丁若鏞)의 학문적인 후계자이었던 정학초(丁學樵)의 출생부터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가 유배가는 상황까지 소개하였다.

정약용은 형제가 화성(華城)에서 유배갈 때 전송하러 나온 정학초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가경(嘉慶)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화란이 일어나서 손암 선생은 신지도(薪知島)로 귀양가고 나는 장기(長鬐)로 귀양갔다. 그해 겨울에 다시 체포되었는데 다시 목숨은 살아나 작은 형님은 흑산도(黑山島)로 귀양 가고 나는 강진(康津)으로 귀양 가게 되어 형제가 같은 길을 떠났다. 


학초는 땋은 머리로 화성 남쪽 유천(柳川)의 주막에서 우리를 송별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1세이었다. 집에 오랑캐 나라에서 나는 사안주(蛇眼珠) 하나가 있었는데 이것은 큰 구렁이의 눈동자이었다. 대체로 이 구슬이 있는 곳에는 뱀이 접근하지 못했고 우연히 뱀과 만날 경우에도 구슬로 비추면 뱀들이 모두 선 채로 죽어 마른 나무처럼 되어버리니, 기이한 보물이었다. 


학초가 울면서 그것을 정약전에게 드리면서, “흑산도는 숲이 우거져 무서운 뱀들이 많은 곳입니다.바라건대, 이것을 가지고 가셔서 몸을 보호하십시오” 하니 손암 선생이 받아 주머니에 넣으면서 역시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마침내 서로 헤어졌다. ]


이와 같이 정약용이 전송을 나온 정학초의 모습을 전한 내용을 통하여 그가 학문만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극진하였던 아들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정약용이 정학초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것을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유추할 수 있는데 해당 내용을 인용한다.


[ 학초가 지난 경신년 겨울에 독서하는 걸 보고서 큰 그릇의 사람이 될 것을 벌써부터 알았습니다.


올봄에는 그애가 물어온 몇가지 조목을 보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습니다.제 생각으로는 금년 가을에 이곳으로 데려와서 겨울동안 가르치고 내년 봄에는 형님곁으로 들어가서 모시고 있다가 4월이나 5월쯤에 돌아간다면 그애는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이와 관련하여 정약용이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를 통하여 계부(季父)로서 조카인 정학초에 대하여 학문적인 재능을 높이 평가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약용은 직접 정학초를 가르칠 마음까지 있었으나 청천병력(靑天霹靂)같은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정학초가 불과 17세가 되는 1807년(순조 7)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인데 이러한 소식을 알게 된 다산의 충격은 대단히 컸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산은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내가 유락(流落)한 이래로 저술한 육경(六經)ㆍ사서(四書)에 관한 학설 2백 40권은 학초에게 전하려 하였더니 이제는 그만이로다. ]


위의 구절을 통하여 정약용은 강진에서 저술한 육경을 비롯하여 사서와 관련된 240권이나 되는 책을 정학초에게 전할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니 이런 모습만 봐도 다산이 정학초를 단순한 조카가 아닌 학문적 후계자로 생각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일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그가 세상을 떠난지 어느 덧 211년이 되었으나 생각할수록 비통한 심정 금할 수 없다.


정학초는 파평윤씨와 혼인하였으나 생전에 후손을 두지 못한 상태에서 17세라는 젊은 연령에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지와 계부(季父)의 유배가 그의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끝으로 정약용의 학문적 후계자로서 재능이 뛰어 났으나 17세라는 젊은 연령에 세상을 떠났던 정학초 서거 211주년을 숙연한 심정으로 추모하며, 그의 생애가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길 바라마지 않는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역사작가.<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저자.브레이크뉴스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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