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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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파주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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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숙 [moon6388] 쪽지 캡슐

2017-02-19 ㅣ No.110198

마태 5,38-48(연중 7주 주일)

 

 

 

오늘 <말씀전례>는 ‘완전한 사랑’ 곧 ‘완덕’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레위기>에서는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고 하시고, <복음>인 <마태오복음>에서는“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하십니다.

 

‘완덕’에 대한 이러한 말씀은 <루카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로, <요한복음>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9)

 

 

 

그렇다면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함은 대체 어쩌란 말씀일까?

 

무관심해라는 말씀일까? 피하라는 말씀일까? 대처하지 말라는 말씀일까?

 

아닐 것입니다. 단지 맞서지 말라고 하십니다. 악과 맞서다보면, 자신도 악에 물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그러니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말씀은 악에 물들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지, 결코 악에 무관심해라는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도피요, 자기기만이요, 비겁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약한지라, 때로는 피해 달아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치, 선조 요셉이 포티파르의 아내에게서 겉옷을 벗어던지고 달아났던 것처럼(창세 39,6-23 참조) 달아나는 것이 상책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은 단지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피한다고 해서 치유되거나 보복심과 복수심이 사라지거나 문제가 나아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오히려 억울하고 원망이 깊어지기 쉬울 것입니다.

 

그러니, 악은 진정한 방법으로 맞서야 할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악을 도피하거나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혹은 그것에 물드는 것이 아니리,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일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악 가운데서도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오히려 선의 통로로 대처하라는 말씀입니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것은 악을 이기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을 불로 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불은 물로 꺼야하듯, 악을 이기는 현명한 방법은 오히려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누가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는’(마태5,39) 것이, 오히려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보복심이나 복수심을 몰아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고 선을 행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만이 진정으로 악과 맞서는 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이는 사랑의 대상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나아가서,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사랑이 더 필요한 대상임을 깨우쳐주십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인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수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이라서가 아닙니다. 미움이 아름다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지 우리 자신이 더러워지지 않으려고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곧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랑하는 것 자체가 이미 기쁨이 됩니다.사실, 자비를 베풀면 자신의 영혼이 해를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타인도 살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5,44)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손수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5)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참조),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당하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참조),말입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비록 악에서는 떠났을지라도, 선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악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을 행할 때, 진정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하신 분께 기도할 때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덕의 최고정점인 ‘완덕’으로 이끄십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본문을 해설하면서, 덕의 아홉 단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덕의 <첫 단계>는 불의로 시작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가 당한대로 되갚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해를 입히는 이에게 똑같은 식으로 대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요, <넷째>는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당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악행자가 빼앗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는 것이요, <여섯째>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요, <일곱째>는 그런 이를 사랑하기까지 하는 것이요, <여덟째>는 그런 이에게 선을 베풀기까지 하는 것이요,<아홉째>는 원수를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결국, 완전한 사랑이란, 결코 흠 없는 무결점의 상태나 죄 없는 완벽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불완전하기에 자신의 약함과 결함을 통하여 흘러든 자비로우신 분의 사랑에 유대를 맺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완덕’은 이미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가능한 일이기에, 그분께 신뢰를 두고 자신의 불완전을 그분의 사랑에 의탁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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