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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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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3-17 ㅣ No.110785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

 

- 윤경재 요셉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21,37~42)

 

 

 

세 공관복음서에 모두 출현하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지금 우리가 알아듣기에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면이 많습니다. 과연 이렇게 불의한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었을까? 예수께서 직접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발설하셨을까? 이 비유말씀을 하셨다면 어디까지가 예수님 말씀이고 어떤 내용은 후대에 첨가되었을까? 이 말씀을 듣는 청중의 심경은 어땠을까? 하는 여러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20세기까지만 해도 학자들은 이 비유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비유가 아니라후세에 첨가된 우화라고인식하였습니다. 이솝 우화처럼 교훈을 주기 위해서 창작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고고학의 발달과 우연하게 초세기 문서들이 발견되어 이 비유말씀과 비슷한 사건이 예수님 시대에 실제로 벌어졌으며 또 예수께서 직접 이 비유를 드셨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밝혀졌습니다.

 

AD6년경 갈릴래아 지방에서 농민 폭동이 일어났는데 유다지방의 부재지주들이 소작료를 급격하게 올리자 이에 반발하여 농민들이 집단적으로 도조를 받으러 온 심부름꾼을 살해하였습니다. 심지어 그 시신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가지고 와 방치하는 미증유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 이후 유다와 갈릴래아 지방 사이에 미움과 증오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도회지였던 유다지방 예루살렘은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모여 살기 편했고 농촌인 갈릴래아는 그들이 살기에는 모든 면에서 불편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늘 청중들이 익히 아는 사실을 가지고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래서 청중들은 예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금세 알아챘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으로 사실일 겁니다.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 지방 동굴에서 고문서들이 다량 발견되었습니다. 그 때 발견된 문서 중에 도마복음서에는 놀랍게도 곱트어로 기록된 예수어록이 114개나 실려 있었습니다. 그중 어록65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 동일한 내용입니다.

 

참고로 도마 복음서 어록65 내용을 적어 봅니다.

 

그가 말씀하셨다. 어떤 선한 사람이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맡겨 그들이 거기에서 일하도록 하고, 그들에게 열매를 받으려 했다. 그는 소작인들이 포도원의 열매를 주도록 종을 보냈다. 그들은 그 종을 잡아 때리고 거의 죽게 만들었다. 그 종은 돌아와서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은 아마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종을 보냈다. 소작인들은 이 종도 때렸다. 다음에 주인은 그의 아들을 보냈다. 주인은 말했다. ‘아마도 그들이 내 아들은 존경할 것이다.’ 소작인들은 그가 포도원의 상속자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잡아 죽였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

 

공관복음서와 비교하면 상당히 간략합니다. 이 뜻은 곧 세 복음서저자가 어느 정도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몇 사항을 가필하였다는 말이 됩니다. 즉 초기 공동체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새롭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이 담겨지게 되었고, 점차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에 대한 그리스도론이 담기게 되었습니다. 구세사적 흐름이 이 대목에 다 녹아들게 된 것입니다.

 

도마복음서에 설명하는 포도원 주인의 태도에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첫째 성품이 선하다고 나오고, 둘째 소작인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것을 소작료를 받는 것보다 우선시하였습니다. 셋째 매번 소작인들의 마음을 읽으려고 추측 하였으며 구체적 행동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비슷한 대목이 있는 성경을 읽을 때 이질적인 부분은 제외하고 공통적인 부분만 찾아서 정리하면 예수께서 육성으로 말씀하셨을 내용이 더 잘 드러나곤 합니다. 그러고 나서 묵상하면 좀 더 생생하고 실감나게 예수님의 호흡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 비유말씀도 초기 공동체가 첨가하였을 알레고리(우화)를 삭제하고 알맹이만 찾아 읽으면 오히려 그 뜻이 명확히 보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고통이 아닙니다. 죄의 대가가 아니라 자신을 완성시키는 일거리입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방편입니다. 평생 일하지 않고 빈둥댄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하겠습니까? 일 하면서 흘리는 땀방울 안에 가족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으며, 울퉁불퉁 솟아 오르는 종아리 근육과 팔둑 힘줄 사이엔 생명이 약동합니다. 내리 쬐는 태양 빛을 피해 시원한 나무 그늘에 두 다리 펴고 앉았을 때 스치는 풀 내음과 꽃 향기는 엄마의 냄새입니다. 석양 붉은빛 노을은 고개 숙여 창조주께 감사 기도 하게 만들며, 둥근 달빛 그림자는 추억에 설레어 눈물 짓게 하기도 합니다. 옹이 박힌 굳은 손바닥으로 아빠를 기다리다 그새 잠이 든 아이들의 볼을 쓰다듬을  땐 하루의 피로가 모두 사라집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일거리를 친히 마련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쯤으로 여기거나 고통스러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마저 독점해서 그 열매를 자기가 다 가지려고 합니다. 자기가 땀 흘려 얻었으니 자기만 독점해야 한다고 우깁니다. 좀처럼 다른 이와 나누어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참고했으니 보상을 받아야 하겠다는 심보입니다. 보상이야 크면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죠. 들인 노력보다 더 큰 혜택을 독차지하려 하죠.

 

주인이신 하느님께 소작인인 인간이 소출한 열매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그 열매를 잡수시기라도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 열매를 팔아 더 큰 부자가 되려고 한다는 말씀입니까? 하느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일해서 과실을 얻었다하더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만큼만 갖고 나머지는 나누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주인에게 바치는 감사의 행동이며 합당한 처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보낸 종들을 학대하고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모든 이유는 자기가 주인이 되고자 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자신의 한계와 처지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생명의 주인이 되고자 온갖 짓을 일삼는 인간의 처신을 빗대어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삶을 누리도록 장소를 만들어 주셨는데 인간들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생명의 주인이 되려고 헛된 짓을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태어나 삶을 영위하는 데에 아무 것도 이바지한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모든 것을 제 노력으로 얻은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결실을 누구에게도 나누어 줄줄 모릅니다. 선물인 생명마저도 제 마음대로 처분하려고 합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입니다. 그러고는 하느님의 선물을 악마의 운명이라고 악명을 붙여 스스로 불렀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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