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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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런 삶과 죽음 -예수님이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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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damiano53] 쪽지 캡슐

2018-03-18 ㅣ No.119068



2018.3.18. 사순 제5주일, 예레31,31-34 히브5,7-9 요한12,20-3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영광스런 삶과 죽음

-예수님이 답이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해 총체적으로 점검해 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영광스럽게 잘 사는지 말입니다. ‘영광스런 삶과 죽음–바로 예수님이 답이다’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영광스런 삶에 영광스런 죽음입니다. 잘 살아야 잘 죽습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20여년전 어느 개신교 목사님과 주고 받는 문답도 생각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일언지하의 대답에 내심 흡족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소원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이자 결론입니다. 좋은 죽음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답은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죽으면 잘 살다다 잘 죽는 것입니다.


어제 두 일간 신문 1면에 이어 두면을 할애한 죽음에 대한 기사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치곤 참 신기하다 생각되었습니다. 비정非情스런 사회일면을 보는 듯 했습니다. 한 신문은 ‘고스트ghost 스토리-죽음이 하는 말’이라는 제하의 무연고-고독사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한 도시에서 ‘포기’되고 ‘처리’된 195명의 죽음에 대한 압축적 기사였습니다. 세상에 남모르게 죽는 완전 고립단절상태의 죽음보다 외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고스트ghost 스토리’, 바로 ‘유령의 이야기’입니다. 죽어서만 아니라 이미 살았을 때부터 존재감 전무한 유령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인 가구의 증가 추세와 더불어 살아있으나 유령같은 죽음의 삶을 사는 이들도 아마 점차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죽은 다음에도 잊지 않고 연미사를 드려 줄 수 있는 지인들을 지닌 고인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요.


다른 일간신문 기사 역시 1면에 이은 두 면이 어느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교육’을 커버스토리로 한 기사였습니다. ‘죽는다는 것’에서 배우는 ‘산다는 것’이란 요지의 죽음교육입니다. ‘죽음은 왜 태어났을까?’ 답은 ‘하루하루 삶을 사랑하게 하려구요.’라는 기사 제목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지막까지 하루하루 하느님의 선물로 알아 감사하며 기쁘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죽음준비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있어 삶이 참 귀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문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로 직결됩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하여 피정지도때 마다 단골로 드는 예가 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 본향집을 향한 순례여정의 삶이다. 죽음은 무無에의 환원還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이다. 내 인생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 보며 귀가준비를 잘 하라.’고 강조하곤 합니다.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생여정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면 오전입니까, 혹은 오후라면 오후 몇시쯤 되겠는지요. 봄-여름-가을-겨울, 일년사계一年四季의 계절로 압축하면 지금 어느 지점의 계절에 와 있겠는지요. 


지상에서 영원한 삶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죽습니다. 쏜살같이,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입니다. 하루가 다 끝나듯, 사계절이 다 끝나듯 죽음도 그렇게 올 것입니다. 하여 사막교부들은 물론이요 분도 성인도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하였습니다.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내 삶의 여정을 압축하여 묵상하면서 귀가준비하듯 죽음을 준비하며 살 때 하루하루가 참 고마운 선물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행복한 삶, 영광스런 삶에 절대적 요소가 관계입니다. 관계는 존재입니다. 관계는 삶입니다.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고립단절의 삶보다 외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대로 유령같은 삶입니다. 참으로 외로움의 결정적 상징이 유령입니다. 외롭게 뿌리없이 떠도는 삶, 유령같은 삶입니다. 


그러니 사랑의 관계부터 회복하고 날로 관계를 깊이하는 것이 유일무이한 대안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예레미야의 새계약은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고 우리 모두 그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날로 깊이할 수 있는 구원의 길, 영광스런 삶의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새계약입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들이 모두 나를 알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바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실현된 새계약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와 더불어 깊어져가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하느님이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믿는 이들은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의 한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교회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가 주님과 형제들과 하나로 결속된 우리의 신원을 늘 새롭게 확인해 주고 강화해줍니다.


영광스런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주님의 성체성사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고난을 통해 순종하는 것을 배우고, 평범한 일상에서 섬기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은 순종을 배우는 학교요 섬김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삶에서 오는 모든 고난을 예수님의 고난에 합류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친히 우리가 겪을 모든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죽음을 예견하고 당황해 하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심히 불안한 마음을 고백하셨고,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생명과 사랑의 소통이요 관계입니다. 기도를 통해 순종할 수 있는 힘도, 섬길 수 있는 힘도 생깁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사랑의 순종, 사랑의 섬김입니다. 인생은 평생 순종을 배우는 순종의 학교요, 평생 섬김을 배우는 섬김의 학교입니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삶, 예수님을 섬기는 삶이 바로 영광스런 삶이요 영원한 삶의 보장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영광스럽기에 죽음도 영광스럽습니다. 영광스런 죽음을 예견하신 주님의 유언같은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우리 모두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 하나처럼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그대로 예수님의 삶을 요약한 말씀이요 모두 이렇게 살라는 유언같은 당부입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 풍요한 부활의 열매들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려면 주님께 순종함으로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순종의 사람들을 아버지께서도 존중해 주십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처럼 죽음의 때는 영광의 때이기도 합니다. 영광스런 삶에 영광스런 죽음입니다. 평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온 예수님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저는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이에 대한 아버지의 화답입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결정적 승리의 선언입니다. 세상은 심판을 받고 세상의 우두머리는 쫓겨납니다. 세상 악에의 결정적 승리요 영광스런 부활의 예표가 땅에서 들어올려진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넘어 영광으로 빛나는 부활의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예수님 말씀입니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바로 우리의 영광스런 미래요 이미 지금 여기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은 우리를 부단히 당신께로 이끌어 들이심으로 당신과의 일치는 물론 형제들과의 일치도 날로 깊게 해주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게 하시며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의 영광입니다. 살아있는 우리는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살다가 영광스럽게 죽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삶에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광스러우신 주님의 은총이 이렇게 해주십니다. 


끝으로 잘 살다가 잘 죽을 수 있는, 영광스럽게 살다가 영광스럽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영생永生의 길을 소개해 드립니다. 바로 제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의 마지막 연이 그 답을 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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