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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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하느님 / 제1회 인생, 하느님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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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임 [rmskfk] 쪽지 캡슐

2019-12-08 ㅣ No.134397

주제: 내 인생의 하느님 (평화TV 신앙의 재발견 강의)

 
제 1 회 : 인생, 하느님의 초대
 
                         김광엽 (세례자 요한) : 문화와 영성 연구소 소장
                                               문학박사.1997년 서강대 대우교수
                                               1996-2002 인천가톨릭대학원강의
                                               국제평신도공동체(clc)회원
 
나는 왜 한 인생을 살게 되었는가? 우리는 내 인생이 나의 계획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작되었고, 내 뜻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때 우리는 내 인생에는 나를 넘어서는 어떤 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믿는다는 것은, 보이는 것들(피조물)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발견해 가는 것이다. 인생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구체적 현장이다. 내 인생이 하느님의 초대이며 나의 인생에는 이처럼 살도록 초대하신 분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내 인생의 하느님'을 깨닫게 되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인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 자칫 우리가 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조금 의식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도 그리스도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와서 살아가는 이 생활부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세례 이전에 다시 말하면 내가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어머니 뱃속에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내가 이 세상에 살게 됐다는 그 순간부터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정말 다시 한번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것은 내 인생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삶을 통해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 갈 것인가? 내 인생의 하느님을 어떻게 만나 갈 것인가? 성사 생활을 하고, 성경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 그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내 인생의 하느님을 만나갈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 주제를 [내 인생의 하느님]이라고 이렇게 택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첫 강의로 [인생-하느님의 초대]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먼저 이러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한 인생을 다 살아가고 있는데 어떠십니까? 여러분들은 인생을 살만하십니까? 이렇게 바꾸어서 질문드려 볼까요?행복하십니까? 한 인생을 이렇게 살아가시는 것이 정말 행복하십니까?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과연 우리가 한 인생을 이렇게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동안 조금씩은 서로 차이는 있겠지만 수십 년을 이렇게 살아오면서 그 많은 경험들을 통해서 이 산다는 것이
참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것을 겪습니다. 그동안 겪어 온 것만도 사실 꽤 다양하게 많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인간관계 안에서 또는 내가 사는 지역 안에서,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많은 것들을 겪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 갈수록 인생은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분명해지기보다 사는 만큼 오히려 인생은 모호해지고, 그리고 사실은 사는 만큼 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도 많아지고, 그래서 때로는 좌절하고 상처받고 그리고 절망하고, 사실은 우리는 살면서 이런 것들을 누구나 이렇게 겪어갈 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인생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한 인생을 이렇게 누구나 겪어갈 수밖에 없는 이런 것들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런 인생에서 ... 그런 질문을 드려봅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이런 인생을 살면서 믿음의 길에 들어오는 동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때로는 이런 인생을 살아가면서 너무나 힘들어서 그런 인생을 잠시 잊고 싶어서 그렇게 신앙을 택하는 경우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때로는 인생에서 겪어 가는 그런 어려움을 신앙의 이름으로 해결하고 싶어서 믿으면 내가 믿는 하느님께서 내가 겪는 이 어려움을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신앙의 길에 들어서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잠시 잊고 싶어서 ... 다시 말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을 피하고 싶어서 들어서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도피지요. 또는 해결하고 싶어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들 중에 적지 않은 경우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내 삶을 피하고 싶어서, 또는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하느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것들이 잊히던가? 내 삶을, 쉽지 않은 삶을 잊을 수 있던가? 내 삶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해결할 수 있던가? 하느님께서 해결해주시던가?이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우리가 삶에서 겪어가는 것들을 다시 직면해야 합니다.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삶으로.
 
또 내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청했던 것들이 하느님에 의해서 잘 들어 주어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기대에 매달려서 이런 기대를 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과연 우리들에게 진심으로 신앙의 기쁨, 평화를 이끌어 줄 수 있을까? 우리가 이런 태도로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 마음 안에서 숨길  없는 것이 있지요. 뭐냐 하면 바로 공허감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수십 년 신앙 생활을 했는데도 내 인생에, 내 삶에 힘이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내 인생의 실제적인 지혜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 믿는 것도 아니고, 내가 몸담고 살아내야 되는 내 인생에서 피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신앙이란, 내 삶을 직시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내 인생을 직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인생에 대해서 과연 인생이란 무엇일까를 오늘 이 첫 번째 시간에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기차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이 기차를 타러 역으로 갔습니다. 그 기차는 이분이 타려고 하는 역에서부터 다른 역에서 오고 있었지요. 그래서 이분은 자기가 타려는 그 역에서 어느 곳에서부터 출발해서 오는 기차를 기다렸다가 이제 타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도 기차가 오면 타고 자리를 찾아가지요? 티켓을 보고 내 좌석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이분도 자기 좌석을 찾아갔는데 거기에는 더 앞선 어느 곳에서 먼저 탄 분이 이분의 좌석 옆자리에 앉아 계셨어요. 그래서 이분은 자기 좌석에 앉으면서 먼저 타고 있는 분에게 인사를 건넸지요.
 
보통 우리가 인사를 건넬 때 어떻게 합니까? 미리 타고 오셨던 옆자리 분에게 특히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인사합니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보통 이렇게 인사를 건넵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아주 실례가 되는
질문이지만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주 친근한 인사지요. 왜 이런 식으로 인사를 던질까요? 사실은 그분 사생활인데.
 
왜 어디까지 가시느냐는 질문을 던지냐 하면 이분과 어느 만큼 함께 가는가를 나도 모르게 알고 싶어서지요. 어느 만큼은 함께 가는가? 말하자면 동반자인 것입니다. 그만큼의 동반자지요. 그래서 이분도 어디까지 가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런데 먼저 타고 오셨던 그분이 그 질문을 듣고는 갑자기 진지하게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면 질문하신 분이 당황을 하시겠지요? 어디까지 가십니까 질문했는데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니까 이분이 당황해서 다른 질문을 이렇게 던졌지요. 역시 인사한 것이지요. "아, 그러면 어디서부터 타고 오셨습니까?" 이런 질문을 다시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더 심각하게 고민을  하시더니 그 두 번째 질문에도 똑같이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질문을 했던 분이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도대체 이 기차를 왜 타신 겁니까?"
그 질문 앞에서 그분은 얼굴이 더 고통스럽게 심하게 일그러졌습니다. 그리고 또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무슨 얘기인가? 우리들은 인생이라는 기차를 타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까 내가 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요. 이 인생이라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디로 가는지, 내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더 문제는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차가 흔들리는 대로 덜컹거리면서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려서 그렇게 인생이라는 기차를 타고 가는 그런 경향이 저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불행한 것은 내가 어디로 가고,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그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사느냐고 바빠서, 지쳐서 사실은 나의 시작과 나의 마지막을 모르고 또한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인생이라는 기차를 타게 된 것이, 내 인생이 시작된 것이,
적어도 내 뜻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내 의지나 내 계획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보니까 나는 살고 있는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요. 내가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누가 나에게 인생을 살게 하셨나? 누가 인생을 살게 한 것일까? 이 질문이 우리 인생에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나를 살게 하신 그 힘이, 그 뜻이, 그 의지가 무엇이가? 누구인가?라는 그 질문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것을 알 길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그러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살아가면서 겪어가는 것들에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질문과 답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과연 누가 인생을 살게 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을 알아가고 깨달아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지금 여기 있는데 나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일까요? 내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다 알지요. 우리가 원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잘 모르시겠습니까? 예, 나는 지금 있지요. 존재는 하지만 원래 나는 없었습니다. 원래 나라는 존재는 있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할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이지요. 원래 나는 없었지요.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지금 있어요. 그렇다면 나는 없다가 있게 된 존재입니다. 어떤 것이 없다가 있게 되었다는 것, 이것은 왜일까요? 인간만이 아니라 원래 존재하는 것들이 원래 없었습니다. 원래 다 없다가 있게 된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이 테이블에 있는 컵이 원래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있지요. 왜 있을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없다가 있게 된 원인이 있지요. 컵이 없다가 있게 된 것은 누군가 만든 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원래 없었기 때문에. 

원래 없었는데 지금 있다는 것은 원인이 있는 것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지금 있지만 원래 없었는데, 이 없다가 있게 된 원인을 누구라고 고백하고 사는 사람들인가? 이게 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내 의지 내 계획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지는 알 길이 없지만, 누군지는 다 헤아릴 길이 없지만, 이 없다가 있게 된 원인이 "야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지요.
 
우리는 이렇게 인생의 실제적인 사실을 가지고 그 사실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가면서 답을 얻어 가려고 애쓸 때 성경에 적혀 있는 이야기가 우리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인생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통해서. 그래서 인생을 하느님의 초대라는 것입니다.
 
내가 계획을 세워서 이 세상에 살러 온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나도 모르게 이렇게 살게 된 것이지요. 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나를 넘어서는 어떤 힘, 의지, 그 절대적인 분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라고 교회의 이름으로 고백하는가? "창조주 하느님"이라고 이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누가 내 인생을 살게 하는가?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다 설명할 길이 없고, 이 인생의 시작, 그 하느님이 누군지 우리가 다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인간과 관계없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 자체도 누가 인생을 살도록 초대한 것인가? 하느님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 두 번째 질문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왜 살게 하셨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왜 살게 하셨나? 나를.
 
아까 이 컵을 얘기했지요? 누군가 만든 분이 있어서 이 컵이 원래 없었는데 지금은 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컵을 만든 분은 왜 만들었을까요? 왜 만들었나 하면 누군가 여기에 마실 것을 따라서 목을 축이게 하려고 그 목적으로 이 컵을 만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컵을 창조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만든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고, 이 컵은 그 목적에 맞게 지금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똑같으시겠지요?  나를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만들어 가실 때에는 만드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인생을 살게 하셨다면  왜 살게 하셨을까? 나를 살게 하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창조의 목적, 내 존재의 목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인생을 살게 된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한꺼번에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한 사람을 만드시는 것 안에 당신의 고유한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생을 살게 하시고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 가면서 그것을  깨달아 가기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왜 나를 인생을 살게 하셨을까? 다시 말하면  내 존재의 목적이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은  아니  모든 인간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살게 된  목적,  내 존재의 목적을 알아 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한 목적을  깨닫게 되면서 목적에 협력해서 살아 나갈 수 있게 그럴 가능성들이 커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인생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생을 살도록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초대장을  받고 살아가게  되었는데 결국 

인생은 살아가면서 그 초대장에 새겨진  그 하느님의 초대의 글을 우리가 읽어가야 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도 하느님께서 나를 살도록 초대하신 그 초대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가 너를 왜 인생을 살게 하셨는가를 내 인생에 새겨 넣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인생이 소중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살아가는 모든 경험들이, 인생이, 경험의 연속이거든요.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하나의 모든 경험들이  사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당신은 왜 나를 인생을 살게 하셨는가를 알아듣게 하시는 초대의 글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살게 하신  목적이  내가 살아 나가는  인생 속에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아주 이 귀한  인생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읽어가려고 애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본당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애쓰는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더  본질적으로  내가 살아가는  삶의 경험 속에서 당신이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를  알아들으려고 애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  왜냐하면 인생은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사실은 마태오복음에서 비유를 통해서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오 22장에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 인생이  하느님의 초대라는 것을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그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어느 임금이 계셨는데  아들의 혼인  잔치에 백성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아들의 혼인 잔치를 차려놓고  백성들을 초대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을 보내서 자신의 백성들을  이 잔치에 오라고 초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초대를 받은  백성들이  다 그 초대에 응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디로 갔는가? 다  자기들 볼일 보러 갔습니다.  모두다 바쁘다. 이런 일이 있다. 저런 일이 있다. 그리고 자기 볼일을 보러 갔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그 하인을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고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임금께서 이번에는 자기 백성이 아니라,  "아무나 데려와도 좋다. 누구나 다 이 잔치에 오도록 하여라."  이렇게  하인들을 다시 보냅니다. 그렇게 하인들이  길거리에 가서 아무나 초대를 합니다. 임금님이 펼치신 그 혼인 잔치에 그래서 사람들이  잔치에 많이 모였는데, 이야기의 뒷부분에 어떤 이야기가 더  나오느냐 하면 그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 사이에 임금님이 오셔 가지고 예복을 갖춰 입지 않은 사람을 나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가 되었다면 혼인 잔치에 걸맞게 옷을 입고 와야  되는데  그냥 왔다. 그것을 질책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초대받은 사람은 많은데 실제로 선택받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고 개탄하시는 이야기로 끝내고 있지요. 이 예수님의 비유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인생이 바로 하느님이 벌이신 잔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창조하셔서 잔치를 벌이셨고, 이 잔치에  나를, 우리를 초대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초대되어 와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비유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누구인가? 잔치에 온 사람들인데 예복을  갖춰 입고 온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잔치에 왔는데 예복을 갖춰 입고

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잔치에 안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 나가는데  이 하느님께서 살게 하신 인생,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인생을 살아나가면서 우리는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를 살아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아서 예복을 갖춰 입은 사람은 무얼 말하는가? 이 잔치가 첫째 하느님의 잔치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인생을 산다는 것이 이게 내가 계획해서 온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벌이시고 살게 하셨다는 것을 이걸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잔치에 갔다는 것은 하느님이 벌이신 잔치에 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예복을 갖춰 입고 갔다는 것은 뭘 말하나? 그 잔치를 벌이신 하느님의 뜻에 협력한 것이지요. 예복을 갖춰 입고 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인생을 살게 하신 나에게  인생을 살게 하신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내가 깨닫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 잔치에 갔으나 예복을 갖춰 입지 않았다는 것은 인생을 이렇게 살게 된 것이 하느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하느님을 믿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은 알고 싶어 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왜 나를 살게 하신 걸까? 내 존재의 목적은 알고 싶지 않고 그냥 내 멋대로 살고 싶은 것이지요.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창조하신 분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목적이 있었기에 생겨났듯이. 그러나 나는 그 존재하는 하느님은 믿지만 그 하느님이 나에게 가지고 계신 뜻, 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알고 싶지도 않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누군가? 잔치에 가지도 않고 자기 볼일 보러 간 것입니다. 이 어떤 분들인가? 이 부류의 사람들은 인생을 누구 잔치라고 생각하는가? 인생은 하느님의 초대가 아니라 자신들의 잔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인생은 내 잔치를 벌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자기 잔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기 잔치를 벌여 가지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 잔치를 벌이는 사람들끼리 부딪치고, 싸우고, 해치고, 비난하고, 절망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인생에 질문을 던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인생이 내 잔치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이  내 잔치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합니다. 뭘 보면 알 수 있는가? 아주 단순합니다. 인생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욕망하는 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조차도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아이가 내 맘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뭘 말하는가? 인생은 내 잔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내 뜻대로 되고 싶어 하다가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이 인생이 내 잔치가 아니라는 것을. 내 아내가, 내 남편이, 우리 아이들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진리는 너무나 평범하고 단순합니다. 진리는 높은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상 속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내 잔치일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오셔서 자기 잔치인 줄 알고 자기 잔치를 벌이다가 불행해져 가는 인간들에게 인생이 내 잔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벌이신 잔치이고, 우리는 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리고 이렇게 직접 비유로까지 말씀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길을 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한 인생을 살게 하신 것은 결국 사랑하며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를 사랑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사랑으로 만드신 것을 깨달은 만큼 우리는 그 사랑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말씀이 그것을 직접 거론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누가 초대하는가? 하느님이 초대하시고 당신이 초대하신 목적대로 살아가게 하신다. 그 뜻을 깨닫는 사람들은 사랑으로 그것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초대하신 것은 알지만 그 뜻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포기하고 삽니다. 사랑하며 사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고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합니다. 내 것만 챙기고 사는데도 이렇게 쉽지 않은데 무슨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배려하고 나누며 살 것인가?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의 길이 바로 죄인의 길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길인가? 인생이 내 잔치를 벌이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내 멋대로 살다가 떠나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사는 동안 정말  폼 나게  한 번 살다 가면  끝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삶은 결국 유한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길이 영원함을 모르고 사는 길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길이  곧 악인의 길입니다. 
 
결국 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의 길을 살아갈 것인가?  죄인의 길을 걸을 것인가? 아니면 악인의 길에 휩쓸려 갈 것인가? 이 중에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선택하는 것은 결국 저희들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희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가는 이 인생이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초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요. 거기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생명의 원천이 하느님이라고. 이것을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바로 잡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느님께서 인생을 살게 하셨다는 것은 뭘 말하는가? 인생을 통해서 다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안에 당신이 말씀하시고 이끌어 가시고자 하시는 것이 내 인생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사소한 경험들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생을 살게 하셨다는 것은 인생에 다 있다는 것이지요.  

혹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도 이 인생을 소홀히 하면서 인생 자체에서 하느님을 만나려 하지 않고 어떤 특별한 시간과 장소 속에서만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기대하고 그런 특별한 것을 찾아 헤매게 될 때 우리는 인생을 살게 하신 하느님의 뜻을 알기 힘들게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인생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인생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인생을 통해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결국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런저런 것들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저를 경험하듯이 저도 여러분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경험의 연속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경험해 나가는 것들이 인생이지요. 당신이 창조하신 것을  로마 1, 19-20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셔서  창조하신 것들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당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하셨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인생의  하느님이란? 하느님께서 초대하신 인생을 살아가면서 내가 경험해 가는 것들을 통해서 특별한 곳에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내 인생의 하느님, 내 시작부터 살아 나가는 모든 순간 그리고  내 마지막까지를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이 하느님을  만나가는 것이 참된 신앙을 살아갈 수 있는 이것이 바로 요체인 것이지요. 인생의 모든 것 안에서.
 
신앙이란 결국 보이는 인생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발견 해 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이들은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깨닫고 인생 안에서 내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살아 있는 하느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그 하느님을 만나갈 수 있는 그런 은총을 청하면서 삶 속에서 애쓸 수 있기를  여러분들에게 청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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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엽 문화와 영성 연구소 소장, 내 인생의 하느님, 인생- 하느님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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