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화)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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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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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umbrella] 쪽지 캡슐

2017-08-17 ㅣ No.113957

지난 729일부터 814일까지 남미에 있는 선교 사제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이번 여정에서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37년 만에 주일학교 선생님을 만났고, 문한림 주교님을 만났고, 선교 사제들을 만났고, 선교 체험을 하는 신학생들을 만났고, 선교 사제와 신학생들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는 현지의 주교님과 사제들을 만났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나라와 도시를 갈 수 있었지만, 현지에 계신 많은 은인들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건강하게 잘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본인의 능력으로, 본인의 결정으로 세상이라는 강을 건너는 것 같지만 돌아보면 많은 분들의 배려와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주일학교 선생님과 현지에 계신 교우분들의 배려가 있었기에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페루에서는 현지에 있는 골롬반 선교회의 지부장 신부님의 배려가 있었기에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는 교구의 총대리 신부님의 세심한 배려가 있었기에 현지 본당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고, 과테말라 교회의 역사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페루에서는 보육원을 방문했습니다. 선교 체험을 하는 신학생들은 비록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 주었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었습니다. 신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마음이 열렸던 아이들은 저희들의 방문도 기쁘게 맞아 주었고, 한국말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주교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복음나누기를 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은을 제련하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제련사는 용광로 위에 있는 은을 유심히 지켜본다고 합니다. 은이 얇은 막이 되어서 제련사의 얼굴이 비출 정도가 되면 은은 불순물이 다 빠지고 온전한 은이 된다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불을 끄고 은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제련사가 용광로의 은을 유심히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주교님이 되시고 3년이 지났는데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자들을 만날 일도 적었고, 강론을 할 기회도 적었다고 합니다. 문득 하느님께서도 제련사가 은을 지켜보듯이 주교님을 지켜보고 계시리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따분하고,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주교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이 비춰지시기를 기다린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뒤로 매 주일 강론을 영상으로 제작해서 SNS에 올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잘 몰랐는데 지금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주교님의 강론 동영상을 보고 있다고 합니다. 주교님은 3년간의 시간을 지내면서 복음을 선포하는 중요한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셨고, 지금은 매주 기쁜 마음으로 강론 동영상을 SNS에 올린다고 합니다. 어쩌면 그런 행동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신학생들을 위해서 운전을 해 주시는 주교님이셨습니다. 숙소의 문을 직접 열고 닫으시는 주교님이셨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일, 빨래와 청소도 모두 손수하시는 주교님이셨습니다. 맑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시던 주교님은 이미 충분히 정화되시어 하느님의 모습을 밝게 비추고 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험한 세상을 건너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조건 없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영어로 용서를 나타내는 말은 ‘Forgive’입니다. For위하여라는 전치사이고, Give주다.’라는 동사입니다. 용서는 위하여 준다.’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목적어는 없습니다. 우리는 목적어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첫째, 나를 위하여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용서해야하는 실질적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가 가득차면 내가 힘들고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화병도 어쩌면 용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둘째, 상대방을 위해서 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수오지심이 있습니다. 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한 사람도 가슴에 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삶이 풍족해져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이런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을 위해서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가 범한 더 큰 잘못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표어가 있었습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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