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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구역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들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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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2-19 ㅣ No.110189


 

남성 구역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들

 

- 윤경재 요셉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4~48)

 

 

 

지난 월요일 남성 구역모임 때 실시한 묵상나누기 7단계는 오늘의 복음이 주제였습니다. 복음 말씀을 두 번 읽고 나서 각자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선택하여 세 번 읽은 뒤 잠시 침묵 기도를 하고 차례대로 묵상나누기 합니다. 몇몇 형제님들께서 마음에 와 닿는 아주 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복수법(탈리온)을 처음들은 것은 천주교에 입교하기 전이었답니다. 그때는 이 법을 내가 당한만큼 복수를 행한다는 개념으로 이해하여 인간의 정의감을 충족시켜주는 법이라고만 알아들었고 별 의심 없이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 입교하고 성경 공부를 하면서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인간은 어떤 손해를 입으면 우선 복수를 떠올리는데 자기가 당한만큼 갚아주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어려서 힘이 센 동네 아이에게 얻어맞고 들어오면 형이 대신 나서서 그 아이를 때려주었고, 또 맞은 그 아이는 집에 일러 더 큰 형이나 두세 사람이 나서서 복수하곤 해서 결국 아이들 다툼이 어른 싸움으로 번진 적이 있었답니다. 개인 간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근현대에 와서 벌어진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도 결국 사소한 오해와 다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태복수법이 구약 율법에 삽입된 이유는 이렇게 무한히 번지는 인간의 복수심을 억제하여 더도 말고 딱 받은 그만큼만 처벌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그것도 자신이 직접 나서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위임받은 권력이 중간에 중재하듯 판결하여 벌을 내리고 꼭 피해를 본만큼만 갚아주자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걸 아셨답니다. 복수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원의가 담겼다는 걸 배우셨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복수의 순환 고리가 과연 끊어졌던가요? 세계1,2차 대전이 모두 국가 간의 복수에서 비롯하였으며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이 모두 뿌리 깊은 복수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지금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분쟁의 뿌리가 모두 증오심과 복수심에서 비롯하였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이 종교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이런 약점을 잘 아셨습니다. 결코 탈리온 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걸 아셨습니다. 그러셨기에 얼핏 들으면 손해 보는 것 같고 부당하게만 느껴지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5,39~40)

 

차분히 생각해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진정성이 우러나오는지 감탄하게 됩니다. 복수의 악순환을 끊어버리고자 한다면 누군가는 나서서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게 확실합니다. 왜 내가 손해를 보느냐는 마음이 남아 있는 한 이런 복수의 악순환은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형제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대목 묵상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원수는 거의 먼 데 있지 않고 예전에 우리 이웃이었거나 지금 곁에 사는 사람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나 단체, 그리고 국가가 우리의 원수가 될 리가 없다. 언제나 밀접한 이해관계 아래서 원수가 발생하는 것같다.”라고.

 

맞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여하튼 서로에게 어떤 묵은 상처가 남았기에 원수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섭섭함이 오해를 낳고 오해가 증폭되어 원수가 됩니다. 이웃끼리 원수가 되어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며 그 형제님께서는 아예 미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어느 신부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렇게라도 하니 미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고 말하십니다.

 

 

또 내가 어떤 잣대를 긋고 내 편과 저 편을 갈랐기에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 편이 아니면 원수이거나 내게 해로운 사람이니 최소한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현대사회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은 정말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아예 그런 말씀을 듣기 싫어지기조차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따져보면 어떤 잣대를 가지고 둘 사이에 선을 그은 사람이 누구던가요?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 시작했을 수도 있으나 결국 자신이 스스로 경계선을 자기 마음속에 그은 것입니다. 최종적인 책임은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멀리한 것은 결국 내 마음에 따라 그리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내 편, 네 편이 있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냥 온 편이었을 것이며, 하느님 편만 있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꼬드김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은 뒤부터 내 편과 네 편이 갈라졌던 것입니다. 내 것은 선하고, 네 것은 악하다고 판정을 내리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피해입니다.

 

만약 내 편끼리만 살고 네 편을 배척한다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반으로 갈라 한 쪽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밉다고 버리는 짓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짓은 하느님도 둘로 갈라 이쪽 하느님과 저쪽 하느님을 만들어 대결시키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입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저지르는 행동을 반성해 보면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뒤에 우리가 바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타당한 이유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듯 이 편, 저 편의 경계선을 가르지 않으시고 우주를 온 편으로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악인이니 선인이니, 의로운 이니 불의한 이니 하는 가름이 실상 우리가 임의대로 그어 놓은 잣대로 나눈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장자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도 내지 않을 것이다.” -토마스 머튼 신부 역.

 

과연 우리의 원수가 어디에 있었나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원수는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미워하고 말고 하는 계제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정말 탁월하셨습니다. 파고들면 들수록 시원한 생수가 샘솟는 원천이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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