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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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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성령 강림 대축일 2018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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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18-05-18 ㅣ No.120547

 

성령 강림 대축일 2018520.

요한 20, 19-23. 사도 2, 1-11.

 

 

성령강림 축일이 되면 우리는 제1독서에서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강림 장면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것은 사실(事實)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체험을 전하기 위해구약성서의 표현들을 빌려 각색(脚色)한 장면(場面)입니다. ‘세찬 바람’, ‘소리’, ‘등은구약성서가 하느님이 나타나신 사실을 말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들입니다. 각자가 다른 언어로 말하고, 각자가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것은 바벨탑(창세 11,1-9)의 이야기를 상기(想起)시킵니다. 바벨탑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며, 하늘에까지 닿는 탑을 쌓아 올려, 자기들의 이름을 날리며 살고자 하였습니다. 인간이 자기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며, 연장하여 하느님을 상상한다는 말입니다.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언어에 혼란을 일으켜, 그들을 사방으로 흩으셨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이 알리는 성령강립 장면에서 성령이 오셔서 사람들 안에 일어나는 일은 그 흩음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성령이 각 사람 위에 혀 같은 불길로 주어지자, 사람들은 각자 자기 언어로 말을 하지만, 듣는 사람은 각자 자기 언어로 이해합니다. 성령은 인간 상호간의 차이를 존중하고, 그 차이는 인간의 상호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인간은 상호간에 차이가 있기에 서로 보고 들을 것이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원활한 사회는 인간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아끼고, 존중하며, 살리는 사회이고, 그것은 다채로우면서 풍요로운 사회입니다. 반면, 한 가지 말을 강요하는 통제된 사회는 인간 생명을 위축시킵니다. 강요와 통제는 생명을 죽입니다. 성령은 인간을 살리십니다. 성령은 인간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다양하게 의사소통하며, 풍요롭게 살도록 하십니다. 풍요로움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그것은 인간 상호간에 자비와 용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고, “성령을 받으시오.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숨을 불어넣는 것은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연상하게 합니다.창세기하느님이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셔서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화답송에서 함께 읊은시편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이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시편 104,30). 예수님이 체포되자 도망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모여들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설교하면서 그들이 자기 생명을 버리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다시 소생한 것이고, 그들의 모습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김인 성령이 하신 일이라는 뜻입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은 개인고백(個人告白) 고해성사에서 사제가 죄를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용서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행 고해성사가 교회 안에 생긴 것은 1215(4차 라테란 공의회), 13세기의 일입니다. 그때까지는 교회 안에 여러 형태의 참회 절차가 있었습니다. 현행 개인고백 고해성사가 도입된 것은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던 그 시대 사람들이 스스로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엄청남 보속, 곧 고행(苦行)을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확실히 심어 주기 위해 만든 개인고백 고해성사입니다.

 

오늘 복음이 죄를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입니다. 한 번은 긍정적으로 말하고 또 한 번 부정적으로 반복하는 화법입니다. ‘용서받지 못한다.’ 혹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사용하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그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상투적으로 쓰던 말입니다. 그것에 반발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단죄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신다고 믿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자기에게 잘못한 이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 36).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성서 안에 있는 부정적 표현들은 하느님 앞에 책임질 수 있게 행동하자는 공동체의 마음다짐이 반영되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척도(尺度)로써 사람을 판단하고, 통제하는 것이 죄라고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요한복음서8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은 당신네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니 그 아비 욕망대로 행하려고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였으며 진리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8, 44). 단죄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며 마귀가 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살리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이웃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준으로 획일성(劃一性)을 사람들에게 강요합니다. 하느님은 다양(多樣)함을 풍요로움으로 보시는 광활(廣闊)한 시야(視野)를 가진 분이십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영()이 살아 계시면, 우리 주변 사람들이 어떤 자비를 체험할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요한 15, 26)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의 실천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있는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성령강림 축일을 해마다 기념하는 것은 하느님의 숨결, 진리의 영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서로의 차이를 풍요로움으로 보는 하느님의 시야를 우리 앞에 열자는 것입니다. 자비롭게 또 은혜롭게 우리 주변을 볼 수 있는 숨결로 살자는 것입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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