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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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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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8-03-14 ㅣ No.118981

 

 2018년 3월 14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복음 요한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는 분 중에서 자기 몸을
끔찍하게 챙기는 분이 계십니다.
분명히 겉모습은 너무나도 튼튼해
보이는데도 어딘가가 아프다면서
힘든 표정을 많이 지으십니다.
하도 그러시기에 병원에
가보시라고 하니, 벌써 병원에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원에서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늘 건강 보조제를
드시고, 유기농으로만 식단을
꾸려서 드십니다.
여기에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까지 아주 열심히 하십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분에
대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오래 살려고 그러는 거야?’,
‘일부러 불쌍해 보이려고
그러는 건가?’,
‘너무 건강에 집착하니까
신경성일거야.’ 등등의 생각을
한 적이 많았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감기를 아주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온 몸이
제 몸 같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콧물과 가래로 인해서
강의를 하는데도
불편함이 많았지요.
몸이 불편하니까 기도하는 것도
힘들고 귀찮아지는 것은 물론
좋아하는 책을 보는 것도
힘들어졌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조금 더 내 몸에
신경 좀 쓸걸.’라는 후회를 했지요.
이렇게 감기를 앓다 보니 자신의
건강에 신경 쓰시는 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오래 살려고 몸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지금을
더 잘 살기 위해서,
지금 해야 할 것과
또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몸부터
신경 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몸을 소홀하게
대하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기는 분을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서 그 안의
 의미를 찾는데 더욱 더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나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만이 옳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내 이웃을 향한
 공감과 이해의 마음을
갖는데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 유다인들은 못마땅해 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커다란 불경에
해당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인들의 이 판단은
맞는 것일까요?
 정말로 예수님께서 죽어야
마땅한 분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몰랐고
자신들의 별 것 아닌 지식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어야
 마땅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예수님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판단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공감과 이해를 위해
노력한다면 어떨까요?
그 안에서 활동하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지금에

대한 것이 아니라

기대감에 관한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오늘만을

살 순 없는 거야

(샤오후 궈)


오늘은 사랑을 나누는 화이트 데이래요.

"절반의 생"

(칼릴 지브란)

절반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

절반만 친구인 사람과

벗하지 말라/

절반의 재능만 담긴 작품에

탐닉하지 말라/

절반의 인생을 살지 말고/

절반의 해답을 선택하지 말고/

절반의 진리에 머물지 말라/

절반의 꿈을 꾸지 말고/

절반의 희망에 환상을 갖지 말라.
침묵을 선택했다면

온전히 침묵하고/

 말을 할 때는 온전히 말하라/

말해야 할 때 침묵하지 말고/

침묵해야 할 때 말하지 말라/

받아들인다면

솔직하게 받아들이라/

거절한다면 분명히 하라/

절반의 거절은 나약한

받아들임일 뿐이므로.
절반의 삶은 그대가

 살지 않은 삶이고/

그대가 하지 않은 말이고/

그대가 뒤로 미룬 미소이며/

그대가 느끼지 않은 사랑이고/

 그대가 알지 못한 우정이다/

절반의 삶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대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그대에게 이방인으로 만든다.
절반의 삶은 도착했으나

 결코 도착하지 못한 것이고/

 일했지만 결코

일하지 않은 것이고/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 그대는 그대 자신이 아니다/

그대 자신을 결코

안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대의 동반자가 아니다.
절반의 삶은 그대가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있는 것이다/

 절반의 물은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하고/

절반의 식사는 배고픔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반만 간 길은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며/

절반의 생각은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한다.
절반의 삶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이지만/

그대는 할 수 있다/

그대는 절반의 존재가 아니므로/

그대는 절반의 삶이 아닌/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존재하는/

온전한 사람이므로...

미국의 시인인 칼릴 즈브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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