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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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나 34]【참행복2】 “슬퍼하는 사람" 십자가의 길 제7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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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cham3385] 쪽지 캡슐

2017-12-07 ㅣ No.116672

[하늘땅나34]【참행복2】 “슬퍼하는 사람" 십자가의 길 제7처 2


<실생활>
7개월 동안 아이로 인한 고통을다 겪고 나서야 제가 6처를 지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당에 가서 그 다음 7처를 바라보며 3처보다 더 많이 땅에 가까이 넘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님을 바라보고는 너무나도 겁이 나서 “주님! 이제 좀 쉬게 하여주십시오! 제발 좀 보류하여 주십시오! 너무나 힘들어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로부터 1년 정도 거짓말같이 저에게는 십자가의 고통이 거의 없었습니다.

새로 맡은 반 아이들은 4학년 남자아이들이었는데,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가 하나도 없었고, 저를 그토록 괴롭히던 동료도 그해 중간에 나가게 되어 같이 합세를 했던 다른 동료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제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겸손”에 대하여 밝히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기에 말씀드리고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제7처의 고통이 시작되기 전 1979년 6월에 루가 복음 19장 11절부터 27절에 걸쳐 나오는 “금화의 비유” 무용극을 하게 되었는데 출연자 열 사람 중에 한사람으로 발탁이 되었지만 한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입회해서 바로부터 예비자들 중에서 몇 명을 뽑아 행사 때에 고전 춤을 추게 하였는데 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선과 칭찬을 받게 되어 그것이 마음 안에서 아주 큰 부담이 되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남 앞에 나서서 어떤 일을 하고 칭찬을 받게 되는 그런 일로 인해 제가 더욱 더 교만해진다고 생각했기에 되도록 남 앞에 나서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용극 총 연습장에 가서 연습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런 저의 생각이 참으로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춤을 출 때에는 잘 몰랐지만 남이 하는 것을 보니 잘못하는 것이 더 눈에 잘 띄어 ‘아유! 저걸 춤이라고 추고 있나? 내가 했으면 훨씬 더 잘 했을 텐데!’ 하면서 저 대신 춤을 추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아홉 사람 모두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비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습습니까? 그런 저의 모습은 결코 겸손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의 모습입니다. 제가 그 일을 하므로 교만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저는 더욱 더 교만해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때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저 자신만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 “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쓰는 것을 칭찬 받으려하거나 저 자신을 남 앞에 드러내고 높아지려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하여 제가 깨달은 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은 결코 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분의 것이며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쓰라고 주신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생각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내가 처음에 무용극을 하자는 제의를 수락했다면 남보다 동작을 더 빨리 익혀 동료들은 물론 전혀 무용에 재능이 없는 사람을 찾아 가르쳐야 하는 책임 맡은 이의 수고를 덜어주었을 것이며 보는 이들도 더 즐겁게 해주었을 텐데....’  제가 그런 것을 피하려고 했던 것은 겸손과 교만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었던 저이기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칭찬’, 행사가 끝난 다음에 느끼는 ‘허탈감’과 그 뒤에 오는 ‘동료들의 곱지 않은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밝히 깨닫고 제가 어떤 대우를 받게 되더라도 “임금님께서 주신 금화 한 개로 다섯 개와 열 개로 늘린 종”(루가 19, 11~27 참조)처럼 주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잘 사용하겠다는 결심을 한 79년 6월 12일에 쓴 일기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일기>
「주님,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풀지 못한 숙제를 오늘은 조금 푼 것 같습니다. 가슴이 시원해 옴을 느낄 수 있어요. 남 앞에 나서서 무엇을 한다는 것을 저는 지금까지 크게 부담을 가지고 있었어요. ‘제가 뭐 잘났다고 그런 것을 해’, ‘남은 할 수 없는데 저는 하니까 잘난 것인가?’ 하며 저 스스로 그것이 자만거리나 교만거리가 되는 줄로 생각하며 괴로워했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지요. 이 비천한 여종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잘난 줄로 착각을 했던 거예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다 당신 것입니다. 저는 단지 당신 앞에서 죄만을 지었을 뿐인 것을... 어찌 제 것인 양 여길 수 있겠나이까? 주님, 이 죄인을 어여삐 여겨주소서. 당신이 쓰시고자 저를 만드셨고, 이 몸 당신 영광 위해서만 존재하나이다. 잠시라도 그러한 사실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깨우쳐주셔요. 주님. 당신의 무한한 자비. 당신의 영원 세세에 찬미 받을 영광만을 위해서만 있게 하소서. 이 죄인에게 주어진 재능, 시간, 능력, 다 당신 것일 뿐이옵니다. 남의 앞에서건, 숨겨진 채로 있건, 다 당신의 영광만을 위해서 존재할 뿐이옵니다. 이제 이런 일로 망설이거나 걱정과 근심을 억지로 끌어다 붙이지 않도록 허락하소서.

“우울한 자의 얼굴은 백 마리 마귀보다 무섭다” 고 하지 않습니까? 그 누구의 걸림돌도 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로 가는 그 누구의 길을 막는 방해꾼이 되지 않도록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당신이 주신 모든 것을 내 부끄러워하지 않으오리다. 잘난 것, 못난 것, 결점, 약점, 장점, 단점, 모든 것을 다 당신 영광만을 위해서 다 바치옵니다. 모든 것을 다 좋게 사용하시는 전능하신 주님, 이 비천한 당신의 종을 사랑의 도구로, 당신 영광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ㄷ) 고 말씀하셨으며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루가 12, 48ㄴ)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게 있는 재능이나 시간들을 마치도 제 것인 양 생각하여 제 마음에 내킬 때에 제 마음대로 사용하려고 하였기에 제 안에서 쓸데없는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게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기에 그분께 맡겨드리고 그분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에 온 힘을 다해 내어놓아 사용한다면 사람들에게 그 일이 어떻게 비쳐질지라도(칭찬이나 비난) 아무런 상관없이 그 안에서 큰 기쁨을 얻어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그 예를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그것을 알아내고 7처의 고통을 겪고 난 뒤에 마음의 여유가 생겼을 때에(1981년 가을쯤)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 는 생각이 나서 아이들의 도화지와 그림 물감, 붓 등을 빌려 “장미 꽃 한 송”이를 그려서 잘 보이는 벽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 그림을 지나가는 여러 사람들이 보고 아주 기뻐하였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자기 반에도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하여 그림을 그려주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에 처음으로 수채화 물감을 쓰던 날부터 그 때까지 창피 당하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그림을 그리지 않았었는데 13년이 지나서야 ‘스스로 원해서’ 다시 붓을 잡게 된 것입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처음 연피정을 갔을 때에도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은 나와서 칠판에 그림을 그려라.” 는 웃어른의 말씀에 외면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 하나가 스스로 나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어이구! 저걸 그림이라고 그리나? 차라리 나처럼 가만이나 있지!’ 하며 비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무용극 사건을 겪고 난 후로는 누가 부탁을 하든지, 어떤 일이든지 거절하지 않고, 누가 시키지 않은 일까지도 아무런 갈등 없이 주어지는 모든 여건 안에서 주님께서 제게 주신 재능을 최선을 다해 사용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만 그분의 보잘것없는 종으로써...

‘성소에 대한 의심!’
삶에 있어서 이것보다 더 힘든 일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결혼 성소 안에 있는 사람이거나 독신 성소 안에 있는 사람이거나 누구나 다 이 것 저 것, 이리 저리 재어볼 대로 다 재어보고 ‘나에게 가장 알맞은 자리가 바로 이 자리다!’ 하는 확신을 가졌기에 스스로 선택하고 나아가는 길이 바로 이 길인데, 이 길에서 자신의 성소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제가 남보다 더 자만심이 강하고 교만하다는 것을 잘도 알고 있기에 스스로 ‘수도원 중에서도 가장 낮게 여김 받는 곳을 택하겠다.’고 생각하여 택한 수도원! 분가한 곳의 교구장으로부터 인가도 받지 못한 곳! 단 한 벌의 수도복으로 일 년을 살며 고무신을 신고 있는 곳! 초등학교 졸업자를 받아주는 곳! 수많은 부랑아들의 엄마 노릇을 하는 곳! 그 모든 여건들에 반하여 자신에게 둘도 없이 좋은 가장 맞는 곳이라 여겨 그 곳에 살게 된 것에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린 그 모든 사유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서 계속(3번)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그 여건 때문에 택한 성소가 그 여건이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되어 자신의 성소를 버리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그러나 세상에는 그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 성소나 독신 성소(수도, 성직)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정 한 알의 밀알로서 열매를 맺기 위하여 굳은 결심으로 그 자리에 들어갔다면 그 여건으로 인해 넘어질 지라도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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