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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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7.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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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17-02-18 ㅣ No.110182

 

2017년 2월 18일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제1독서 히브 11,1-7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3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4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5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하늘로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무도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늘로

들어 올려지기 전에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다.”

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6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7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에 따라

받는 의로움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복음 마르 9,2-13

그때에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11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째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먼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는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과 멸시를 받으리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13 사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엘리야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

요즘에 흙수저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의 능력이나
형편이 넉넉지 못한 어려운
상황에 경제적인 도움을
전혀 못 받고 있는 자녀를
지칭하는 신조어입니다.
자신이 금수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부모를 원망하고
이러한 자신의 상황을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 나아가 사회의
잘못된 구조로 인해
자신은 평생 이러한
흙수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요?
이런 분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나
던져 보고 싶습니다.
두 척의 배가 항해를
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세차게 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척의 배는
어느 방향으로 항해를 할까요?
 바람의 방향을 따라
서쪽으로 항해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배 한 척은 동쪽으로,
다른 배는 서쪽으로
항해를 했습니다.
왜 이렇게 정반대 방향으로
항해를 할 수 있느냐고요?
배가 움직일 때 바람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고자 하는
방향이 분명하다면
돛을 어떻게 세우고 노를
어떻게 젓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결코 바람 때문에
방향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주위의
영향으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이렇게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의의 영향이
어느 정도
 미칠 수는 있지만,
나의 전부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분명한 의지를 세우고,
 이 의지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때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의 거룩한 이 변모에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고 제의를 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살 수 있는 이곳이
가장 행복한 자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느끼는
지금의 자리에 안주하는
삶이 아닌, 어렵고 힘들지만
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입니다.
‘~ 때문에’라는 말로써
방향을 잡지 못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편하고 쉬운 길을
지향하고 또 그 자리에
안주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우리 삶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인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내 의지를 세우고,
이 의지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그분의 말씀을 철저하게 듣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뭐라고
부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하는가이다.
(W.C 필즈)
타볼산의 주님 거룩한 변모 성당의 벽화.
"행복의 비법"
(‘좋은생각’ 중에서)
어느 마을에 부자가 있었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스님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스님이 말했다.
“산속 절에 행복의 비법을
숨겨 뒀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워낙 멀어 여비는
두둑이 챙겨야 합니다.”
그는 많은 돈을 챙겨
스님을 따라나섰다.
여러 마을을 지나는 동안
가난한 사람을 수없이 만났다.
그때마다 스님은
여비를 주라고 했다.
주머니가 점점 가벼워지자
그가 걱정했다.
 “염려 마세요.
분명 즐겁게 집으로
 돌아갈 겁니다.”
스님의 말에 안심한 그는
남은 돈을 모두 나눠 줬다.
절에 도착하자
는 서둘러 물었다.
 “행복의 비법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님이 대답했다.
“비법은 이미 알려 주었습니다.”
“언제요? 전혀 모르겠어요.”
스님은 빙긋 웃기만 했다.
그는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나 혼자 돌아갔다.
어느 마을에 도착할 무렵
해가 졌다. 배가 고프고,
머물 곳이 필요했지만
돈이 없었다.
그때 한 농부가 다가왔다.
“제 은인 아니십니까?
무슨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농부는 그를 집으로 초대해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했다.
이튿날 그는 다시 길을 나섰다.
가는 곳마다 그에게 도움 받은
이들이 나타나 보답했다.
 무사히 집에 돌아왔을 때
그는 스님이 말한
행복의 비법을 깨달았다.
행복의 비법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이 삶을 통해 진정한 행
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새로 이전한 인천교구청사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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