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170324 -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스크랩 인쇄

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3-24 ㅣ No.110962




2017
03 24 () 가해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호세아서 14,2-10
마르코복음 12,28-34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유대교 율사와 대화하신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율사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구약성서 율법 중 두 조항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신명기(6,4-5)의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레위서(19,18)의 계명입니다. 상대가 율사이기에 예수님은 그가 잘 아는 구약성서의 율법 구절들을 인용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 어떤 문헌에는 오늘의 율사가 한 것과 같은 질문이 있고, 유대교 당국의 답이 있습니다. 그 답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 것, 피를 흘리지 말 것,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지 말 것, 안식일을 범하지 말 것이다.” 유대교는 사랑을 첫째가는 계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유대교가 사랑을 말할 때는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마태 5,43)는 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미움에 반대되는 우호적인 자세를 의미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그 근본에서 흔들어 놓았습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인간은 두려운 하느님을 섬겨야 합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섬기는 길입니다. 하느님은 절대 군주와 같이 군림하고, 인간은 무서운 군주 앞의 노예와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의무를 한 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제한 없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듯이, 이웃을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10,29-37)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아 준 것은 하느님이 두려워 한 일도 아니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강도 맞아 죽게 된 사람을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서, 그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였습니다. 요한사도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닫는다면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그 사람 안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1요한 3,17)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우리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확인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 주고, 맹인을 눈뜨게 하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한 것은 모두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몸짓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초기 교회는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불쌍히 여김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원 후 100년경에 기록된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 그대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그대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3,34-35)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은 이웃을 보는 우리 시선의 중심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유대인이 이웃을 볼 때, 그 시선의 중심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이웃은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시선의 중심을 자기 앞에 있는 이웃 안에 두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이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웃의 상황에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는 시선의 중심을 아기 안에 두고 그 아기의 상황에 참여합니다. 아기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웃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가 우리의 사랑을 결정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앞에서 언급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 그 주인공은 강도 맞은 사람을 만나, 그에게 필요한 일을 다 하였습니다. 그것이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초기부터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보면, 모두가 우리의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요한의 편지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실상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고 사랑하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어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른다.(4,8)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그 사랑의 원천은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같은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흐르고, 또 우리에게서 이웃에게로 흐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그 흐름을 차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 사랑 안에 머뭅니다.

오늘 복음의 율사가 예수님에게 한 질문은 ‘첫째가는 계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개의 계명을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입니다. 오늘의 율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알아들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 율사로서는 할 수 없는 파격적인 발언을 합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이 율사는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듣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두려운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얻어내는 자기중심적 신앙에서 물러섰습니다. 그는 신앙이 하느님 사랑의 흐름 안으로 들어서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율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졌던 선입견을 버렸습니다.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 등에 대한 애착으로 선입견을 갖습니다. 그 선입견은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것에 대한 애착보다는 이웃의 필요를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불쌍히 여기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김에서 사랑이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는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을 자기 생명의 원천으로 삼아 실천하며 삽니다. 그것은 개체유지나 종족유지의 본능을 넘어 하느님에게로 도약하는 사랑입니다. 인간 본능으로 말미암은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느님을 동기로 한 도약이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128 2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