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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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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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ystefano] 쪽지 캡슐

2003-07-02 ㅣ No.5063

7월 3일 목요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요한 20장 24-29절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느님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평생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염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찐한 하느님 체험"일 것입니다.

 

저 역시 수도자로 살면서 늘 부끄럽게 생각하는 일 한가지는 제 신분 상 언제나 하느님을 눈앞에 뵙는 듯이 살아야될텐데, 하느님 두려워하며 살아야될텐데, 그래서 하루 하루를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서 이렇다할 체험이 없이, "이거다" 하는 확신도 없이 살다보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물에 물 탄 듯한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가끔 신자들께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하느님 체험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할 때면 더욱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게 됩니다.

 

이럴 때마다 한가지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수도자에 대한 특별우대가 없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합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얻게되는 프레미엄이란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는다면, 기도에 투자하지 않는다면 성직자 역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하는 비신자나 냉담자처럼 지낼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최근 제가 느끼는 갈증 가운데 가장 큰 갈증은 하느님께 대한 갈증입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그분 얼굴을 뚜렷하게 뵈올 수만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텐데...단 한번만이라도 예전처럼 강렬하게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정말 잘 살수 있을텐데..."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러나 사실 하느님은 우리의 영적 생활의 무미건조함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시고 우리 인간 역사에 활기차게 역사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 삶 가운데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토마스 사도는 눈으로 반드시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불신에 가득 찬 우리 인간의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죽어도 못 믿겠다"는 외침은 바로 오늘 우리의 외침입니다.

 

하느님은 고통과 눈물 그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데,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거냐"고 외칠 때 우리는 또 다른 토마스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보다 각별한 하느님 체험을 위해 노력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그런데 하느님 체험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선물입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속성과정이나 암표는 이 세상 어딜 가도 없습니다.

 

하느님 체험을 위한 족집게 과외는 따로 없습니다. 오직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 하느님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만이 우리를 보다 강렬한 하느님 체험에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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