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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호세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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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8-03-10 ㅣ No.118880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호세6,1-6)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1)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2)

 

여기서 '자' 또는 '오라'로 번역될 수 있는 '레쿠'(leku; come)은 어원상 걸어가는 행위를 지칭하는 동사 '얄라크'(yallak)의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서 '너희는 걸어가라'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죄악과 범죄의 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적극적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가자'에 해당하는 '웨나슈바'(wenashubah; and let us return)원형 '슈브'(shub)호세아서 5장 13절에서 주님께서 당신 자리로 돌아갈 것임을 나타낼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한 단어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호세아서 2장 7절에서 이 단어는 간음을 행한 여인으로 비유되는 이스라엘이 본 남편인 주님께로 돌아감을 지적하는 데 사용되었고, 호세아서 3장 5절에서는 이 단어가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하느님을 떠난 상태로 살아가다 다시 그분에게로 돌아갈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그들은 원래 하느님의 품에 있으면서 평화를 누리던 자들이었는데 주님을 떠나버렸다. 

마치 고메르가 남편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갔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을 떠나 바알을 중심으로 해서 이방의 각종 우상들을 오래 동안 섬겼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결국 이스라엘에게 주님의 심판을 초래했다.

이스라엘은 죄에 대해 주님께 이미 심판을 당했든, 아니면 아직 심판을 당하지 않았든 원래 있어야 할 곳을 떠나 엉뚱한 곳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속히 그들의 영적 고향인 주님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이 본문은 훗날 이스라엘이 아시리아를 통해 당하게 될 극한 고난, 멸망과 포로 생활을 상징하고, 그 후에 주님의 회복하심의 은혜가 있을 것을 예언하는 구절이다.

원문에는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하는 문장으로서 왜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비록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국가적 멸망은 불가피하지만, 그후에 주님의 회복의 은총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 본문에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에 해당하는 '타라프'(taraph; has torn us to pieces)의 기본형호세아서 5장 14절에서 '잡아 찢어가고'로 번역된 '에트로프'(etroph)의 원형과 동일하다.

이러한 일치는 비록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사자(a lion)처럼 이스라엘을 움켜쥐고 갈기갈기 찢어버리셨지만, 이후(以後) 정한 시기에 이르면 고쳐주시는 회복의 은총을 베푸실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에 해당하는 '웨이르파에누'(weirphaenu; but he will heal us)의 원형 '라파'(rapha)는 어원상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레위13,18; 신명32,39).

특히 신명기 32장 39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치기도 하고 고쳐 주기도 하는 유일한 존재로 선언하신다.

사실 하느님께서 찢으신 것을 고쳐줄 다른 세력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찢으신 상처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만이 치료하실 수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주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서도 상처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한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 징계를 당할 때,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께 돌아가 회복의 은총을 누리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분께 대해 더욱더 적대적인 마음으로 끝까지 대항하다가 최종적으로 멸망을 당하고 만다.

호세아서 6장 1절 후반부터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에 해당하는 '야크 웨야흐뻬셰누'(yak weyahbeshenu; he has injured us but he will bind up our wounds) 호세아서 6장 1절 전반부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같은 내용의 병행 대구 문장으로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자에게 회복의 은총이 보장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한다.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2)

호세아서 6장 2절의 예언은 주님께서 고난 중의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하시는데, 조속한 시일 내에 그들에게 회복의 은총을 누리게 할 것을 강조하는 예언이다.

여기서 '이틀 뒤에' 그리고 '사흘 째 되는 날에'라는 표현에서 '둘', 혹은 '셋'이라는 숫자는 구약 성경에서 수나 양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나타내는 표현으로 많이 쓰였다(욥기5,19; 잠언30,15).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틀 뒤에', 그리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일으킬 것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조속한 시일 내에, 그리고 확실히 회복시킬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자면, 금요일 오후에 무덤에 묻혀 안식일인 토요일 하루를 지내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 시간은 날짜로 보면 사흘이요, 시간으로 보면 이틀이다.

 

그리고 '우리를 일으키시어'에 해당하는 '예키메누'(yeqimenu; he will restore us; he will raise us up)의 원형 '쿰'(qum)어원상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이다(창세19,1; 24,54). 

여기서는 사역 능동형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으며, 앞의 '우리를 살려 주시고'라는 표현과 같은 뜻의 병행 대구를 형성하는 단어로 쓰였다. 

즉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멸망과 죽음의 형편에 놓인 이스라엘을 새롭게 회복시키실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본문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 결과 그들이 경험하게 될 일을 나타내는 예언이다. 

'우리가 ~살게 되리라'에 해당하는 '웨니흐예'(wenihyeh; and we shall live)원형은 문두에 나오는 '우리를 살려 주시고'('예하이예누'; yehaiyenu; he will relive us)해당하는 단어의 원형과 동일한 '하야'(haya)이다.

이것은 어원상 목숨을 스스로 유지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사역의 의미, 누군가가 살게 하는 것, 살리는 역사(役事)로 인해 생명이 영위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여기서는 미완료 1인칭 복수로 쓰였으며,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회복과 소생의 역사(役事)하심으로 살아나서 하느님 앞에서 살게 될 것임을 강조한다.


특히 그들이 하느님 앞에 살게 되리라는 표현은 그들이 더 이상 하느님을 떠나지 않고, 더 이상 우상을 쫓지 않고, 하느님과 평화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느님으로 인해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갈 것임을 나타낸다. 

 

그들은 외적 상태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영적 상태까지 회복될 것임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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