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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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17 -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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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8-17 ㅣ No.113955




2017
08 17 () 가해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여호수아기 3,7-10.11.13-17 /
에제키엘서 12,1-12
마태오복음 18,21-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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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여호수아기 3,7-10.11.13-17

그 무렵 7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내가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너를 높여 주기 시작하겠다. 그러면 내가 모세와 함께 있어 준 것처럼 너와도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8 너는 계약 궤를 멘 사제들에게, ‘요르단 강 물가에 다다르거든 그 요르단 강에 들어가 서 있어라.’ 하고 명령하여라.

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였다. “이리 가까이 와서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10 여호수아가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 일어날 이 일로써,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너희 가운데에 계시면서, 가나안족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1 , 온 땅의 주인이신 분의 계약 궤가 너희 앞에 서서 요르단을 건널 것이다. 13 온 땅의 주인이신 주님의 궤를 멘 사제들의 발바닥이 요르단 강 물에 닿으면, 위에서 내려오던 요르단 강 물이 끊어져 둑처럼 멈추어 설 것이다.

14 백성이 요르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천막에서 떠날 때에,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백성 앞에 섰다.

15 드디어 궤를 멘 이들이 요르단에 다다랐다. 수확기 내내 강 언덕까지 물이 차 있었는데,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물가에 발을 담그자, 16 위에서 내려오던 물이 멈추어 섰다. 아주 멀리 차르탄 곁에 있는 성읍 아담에 둑이 생겨, 아라바 바다, 곧 ‘소금 바다’로 내려가던 물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백성은 예리코 맞은쪽으로 건너갔다.

17 주님의 계약 궤를 멘 사제들이 요르단 강 한복판 마른땅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동안, 온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건너서, 마침내 온 겨레가 다 건너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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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에제키엘서 12,1-12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3
그러니 너 사람의 아들아, 유배 짐을 꾸려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가거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사는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배를 가거라. 행여 자기들이 반항의 집안임을 그들이 깨달을지도 모른다. 4 너는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유배를 떠나듯이 떠나라.
5
그들이 보는 앞에서 벽을 뚫고 나가라. 6 너는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가는데,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마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을 위한 예표로 삼았다.”
7
나는 명령을 받은 대로 하였다. 짐을 유배 짐처럼 싸서 대낮에 내어놓았다가, 저녁에 손으로 벽을 뚫고, 어두울 때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짐을 어깨에 메고 나갔다.
8
이튿날 아침에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9 “사람의 아들아, 저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집안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너에게 묻지 않았느냐? 10 그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이 신탁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장과 그 안에 있는 온 이스라엘 집안에 관한 것이다.’
11
너는 또 말하여라. ‘나는 여러분을 위한 예표입니다. 내가 한 것과 똑같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갈 것입니다.’ 12 그들 가운데에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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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복음 18,21-19,1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19,1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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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08 17일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물이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이 무사히 이집트를 탈출하였습니다. 또한 여호수아가 요르단 강을 건널 때, 계약의 궤를 맨 사제들이 강에 들어서자 강물이 둑처럼 되어서 멈추어 섰고, 이스라엘 백성이 놀라워하며 강을 건넜습니다. 엘리사 예언자가 스승 엘리야의 외투로 요르단 강물을 치니 물이 양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이렇게 요르단 강물은 하느님의 보호와 사랑, 하느님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강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회개와 용서의 삶을 살도록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물과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 하느님을 섬기는 자녀들의 은총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로 우리의 모든 원죄와 본죄를 용서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을 체험한 자녀들의 삶은 용서와 자비의 삶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무자비한 종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남의 잘못을 단죄하고 용서하지 않으며 남을 괴롭혔습니까
우리는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으므로 남의 잘못과 죄를 무한히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용서하는 행위의 숫자는 무한대입니다. 남을 헐뜯고 단죄하는 일들로 우리가 연옥에서 갚아야 할 빚은 더 늘어납니다. 우리가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며 남의 잘못을 용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합니다. 자비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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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08 11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매우 고약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왕에게 하소연하여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자신의 동료에게는 모질게 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탕감받은 돈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액수를 빚진 동료를 매정하게 감옥에 가두었지요.
어쩌면 이런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에게는 너그럽지만, 다른 이에게는 모질게 대하는 경우가 없는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자신은 늘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함부로 하면서도, 막상 다른 이가 조금만 서운하게 대하면 큰 모독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자신은 남에게 늘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이 조그만 상처라도 받으면 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빚진 이들이 아닙니까? 비록 크건 작건 간에, 누구나 다 하느님께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누구나 완전한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두가 부족하고 부끄러운 점이 있지만, 그 부족한 부분까지 내보이면서까지, 좀 더 하느님 뜻에 충실히 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끼리 결코 헐뜯고, 단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듯 자신의 동료를 감옥에 가둔 저 몹쓸 종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내가 몸담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서로 돕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 가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존재임을 더욱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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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0813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성 폰시아노 교황과 성 히폴리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라삐들은 누군가에게 잘못하면 세 번까지 용서를 청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한 베드로는 관대한 사람에 속합니다. 예수님께서는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곧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종에 관한 비유 말씀을 들려주시는데, 이 비유 안에서는 하느님의 끝없는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인간의 옹졸함과 비정함이 대조를 이룹니다. 이 비유는 신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적인 교훈, 곧 용서받으려면 용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하는데, 용서와 자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참으로 많습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하시고,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 다음에는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마태 6,1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고보 서간도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2,13) 하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는 나란히 갑니다.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채무를 탕감 받았습니다. 곧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으니,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아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가 정말로 어렵다고 생각될 때,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미사 참회 예식의 자비송을 떠올리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며 노력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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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08 14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의 명에 따른 에제키엘 예언자의 행동은 이스라엘의 멸망의 예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언자들이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와 삶을 통해 스스로 표징이 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만납니다. 성인들의 삶과 운명 또한 그러합니다. 그들이 살아온 모습과 죽음의 방식, 결단의 순간은 영웅적인 성덕을 보여 주는 개인적인 사건만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아픔과 악을 드러내는 시금석이자 인간의 희망과 하느님 섭리의 표징입니다.
오늘 (2014 8 14) 우리가 기념하는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삶과 죽음은, 한 성인이 끌어안은개인적 운명이 때로는그 시대의 역운전체에 대한 살아 있는 표징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 줍니다. 콜베 신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상징되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악의 한복판에 던져졌습니다.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이라는 죽음의 방식은 세기 내내 수많은 비참함과 모욕과 고통의 대표적인 표징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야만 속에서도 인간의 길이 결코 비참함과 부조리만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한 형제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방식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함께 죽어 가는 이들이 서로의 존엄을 지켜 주는 기적의 근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창궐하는 악의 한복판에서도 꺼질 수 없는 인간다움의 희망이 콜베 사제라는 한 인간을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
거듭되는 악과 고통의 현실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하느님의 섭리가 참으로 존재함을 믿고 희망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섭리는, 콜베 신부처럼 한 사람의 운명이라는 작은 창을 통하여 찰나의 순간에 번개같이 우리를 스쳐 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문득 교회는 체제가 아니라 성인들이 지켜 나가는 것이라는, 그 옛날 신학교에서 배운 원로 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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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08 15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성모 승천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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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08 16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기념일)


한수산 요한 크리소스토모 작가가 자신의 체험을 쓴 『용서를 위하여』라는 책을 제게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채 차일피일 미루다가 근래에 다 읽어 보았습니다. 작가의 체험은 용서가 얼마나 힘이 든지를 알려 줍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것 또한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깨닫게 해 줍니다.
군사 정권의 제5공화국 시절, 한수산 작가는 어느 신문에 썼던 연재소설이 빌미가 되어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 갑니다. 그가 끌려간 곳은 보안사령부 지하실이었습니다. 그의 죄목은 정부 비판을 통한 사회 혼란을 목적으로 유언비어를 유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너무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갖은 고문을 다 받습니다. 그는 몸과 마음이 모두 만신창이가 되어 풀려납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힌 자신이 벌레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자신을 벌레로 만든 사람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고문으로 받은 상처와 모욕감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그는 성당을 찾게 됩니다. 멍들고 상처 받은 영혼을 깨끗이 씻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도 자신을 고문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한 말씀이 그의 가슴을 찢으며 불길처럼 그를 휩싼 것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 그는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도 주님의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용서함으로써 비로소 미움이라는 어둠의 긴 터널을 빠져나옵니다. 미움의 독에 빠진 그에게 마침내 평화가 찾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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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08 11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창세기가 전하는 요셉의 긴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창세 37,1-47.31).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그들 손에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나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마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요셉은 그야말로 삶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파라오의 꿈풀이를 해 주면서 당시 온 땅에 밀어 닥친 기근을 다스리는 이집트의 재상으로 곧바로 임명됩니다. 이때 자신을 죽이려다 이집트로 팔아넘긴 자기의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로 찾아옵니다. 다음은 자신의 깊은 상처와 기구한 운명에도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으로,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4-8).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용서를 하지 못한 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개하는 책들도 수없이 나와 있으며,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시간이 가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요셉처럼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하느님 안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 속에서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그것을 당신의 은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상처를 통해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이 무엇인지를 해석해 내는 순간 요셉처럼 우리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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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08 12)
(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 기념일)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마련하신 공동체의 일원입니다. 주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당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초대해 주시고, 한 가족으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는 오직 사랑으로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바로 그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주님의 공동체에서 용서의 한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행위가 끝이 없는 것처럼, 용서하는 행위 또한 끝이 없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때, 이미 아버지께 넘치도록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잘못한 이웃을 얼마만큼 마음 깊이로부터 용서하느냐에서 드러납니다. 용서가 없는 곳에서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라도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거기에는 증오와 죽음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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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08 13)
(
성 폰시아노 교황과 성 히폴리토 사제 순교자 기념일)


‘탈렌트’는 고대 사회에서 통용되던 가장 높은 ‘화폐 단위’입니다. 유다인들도 사용은 했지만 실생활에서 자주 쓰이지는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은 ‘한 탈렌트’의 가치를 ‘금 33kg’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올해(2009) 국내 금값은 1(3.75g)당 대략 16만 원입니다. 따라서 한 탈렌트( 33kg)라면 14억 원이 넘는 큰돈입니다
그런데 임금은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을 탕감해 줍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조건도 없었습니다. 완벽한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하지만 탕감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그를 고발해 돈을 받아 내려 했던 것이지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예화입니다. 주님께서는 ‘큰 용서’를 베푸셨지만, 인간은 ‘작은 용서’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를 기억한다면, 가족이나 이웃의 잘못은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임금은 만 탈렌트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남자는 단돈 백 데나리온의 미련 때문에 ‘새 삶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탕감받은 돈’은 망각하고 ‘받을 돈’만 생각한 결과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그런 실수는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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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08 14)
(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는 늘 이렇게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러나 이 기도에 어울리는 행동은 얼마나 실천하며 사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동물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만이 용서의 개념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닮으려면 자꾸만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형제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될는지요?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으로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용서에는 숫자가 없음을 강조하신 겁니다.
현대인들은 숫자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숫자에 매여 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어쩌면 정작 우리가 베풀어야 할 용서는 단 한 번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일생 닦아야 할 용서의 덕은 단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일지 모릅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순간에 생긴 미움이 아닙니다. 쌓이고 쌓인 미움입니다. 한순간에 용서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욕심일 뿐이지요. 그러니 미움이 생긴 만큼의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끝없는 용서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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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08 16)
(
헝가리의 성 스테파노 기념일)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큰돈을 빚진 사람이 탕감을 받았으나 정작 그는 아주 작은 돈을 갚지 못하는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누가 들어도 분개할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평생 뒷바라지한 아내를 속이고 다른 여자와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금방 부도날 줄 알면서도 친구를 속이고 돈을 빌리는 이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의 가슴에 큰 상처를 내면서 고통을 안깁니다.
이러한 사람도 용서해야 될까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크나큰 덕입니다. 옛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덕을 닦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희생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참았고, 먹고 싶은 것을 절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깨달음이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고 주님의 힘이 내리실 때까지 기도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도움의 은총으로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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