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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포틀래치 풍습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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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3-16 ㅣ No.110761

 

인디언의 포틀래치 풍습

 

- 윤경재 요셉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16,31)

 

 

 

북미 인디언인 치누크 족에는 특이한 풍습이 전해져 옵니다. 족장이나 지배층 계급이 자신의 재산을 팔아 부족에게 선물로 나누어주는 행사입니다. 그들은 이런 행동을 포틀래치(potlach)’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먹여주다’ ‘소비하다를 뜻하는데 자신의 부와 재산을 최대한 선물하고 파괴하는 자가 최고의 명예를 얻습니다. 이런 이가 대개 부족의 추장이 됩니다.

 

잘못 이해하면 포틀래치를 명예나 권위를 얻어 추장이 되기 위한 책략이나 투자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여 추장이 되었을 땐, 정치적 권위를 얻는 대신 경제적 부를 모두 상실한 상태가 됩니다. 반대로 경제적 부를 모으고 아끼려는 자는 절대로 정치적 리더가 되지 못합니다. 그는 인색한 자라는 가장 모욕적인 평판을 얻고 이웃으로부터 비난받고 소외됩니다.

 

인디언들처럼 정치적 지위를 얻으려면 경제적 부를 완전히 포기해야 하고, 경제적 부에 애착이 있으면 정치적 지위에 접근할 수 없게 하면 지도자의 지위는 부족민의 신뢰를 잃는 순간 지속할 수 없게 됩니다. 정치적 지위를 이용해 부를 모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포틀래치는 부가 정치적 지위를 보호하고 정치적 지위가 부를 확대하는 악순환을 끊어줍니다. 포틀래치는 선물을 통해 각자의 능력과 관대함을 시험하고 경제적 부와 정치적 지위가 결합되는 것을 막아주는 장치입니다.

 

포틀래치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부의 축적 자체를 막고 정기적으로 재산을 소모해버리는 순수소모자체에 있습니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 이상으로 부가 축적되면 그 부는 무엇에 사용하게 될까요? 남에게 빌려주어 이자를 얻거나 남을 고용하여 자기에게 필요한 일을 시키는 데 사용될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축적된 부의 격차는 점점 커질 것이고, 결국 부자와 가난한자의 격차가 커지며 계급대립이 생겨납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정기적으로 필요 이상의 부를 소모해서 죽여 버리는일을 하는 것입니다. ‘축적이 당연시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이해하기 힘듭니다.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서 나오는 부자는 늘 나는 부자이다.’라는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생각을 상상해보면 이랬을 겁니다.

 

내가 부자가 된 이유는 결국 내가 부지런히 일해서 얻은 결과이다. 부유하셨던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재산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물려받은 재산을 불리려고 머리를 써가며 갖은 고생을 다했다. 여러 번 고비가 찾아왔지만, 나는 그때마다 유혹에서 견뎌내었다. 그러니 하느님께 축복을 받아서 이렇게 부자가 된 것이다.”

 

지금 헐벗고 가난한 자들은 모두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리된 것이다. 게을렀다든가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인생을 낭비한 결과이다. 그들이 가난하고 불행하게 된 데는 모두 그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모두 나는 어떠한 ~ 나이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것을 철학에서는 인칭적 자아인식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사람은 어떤 때는 한 가정의 부모로, 또 자식으로, 학생으로, 직장의 일원으로, 한 국가의 국민으로, 여성과 남성으로 주위 관계성에 따라 자의식이 바뀝니다.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은 인칭적 자아의 틀에 갇혀 자신을 개방하지 못합니다. 소수의 깨어난 사람들과 성자들만 인칭적 자아에서 벗어나 타자를 맞아들입니다.

 

이 부자는 처음부터 영원히 자기는 부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가 아닐 가능성을 완벽히 배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는 현세에서 건널 수 없는 장벽이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라자로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영원한 타자였습니다.

 

더 나쁜 것은 심리학에서 수퍼 에고라고 부르는 억압된 도덕관념과 인칭적 자아가 결합될 때입니다. 수퍼 에고는 우리 안에서 감시자 역할을 합니다. “~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인정받으려면 ~해야 한다. ~한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마라.” 등등 우리는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따져 묻지 않고, 자동인형처럼 처신하기를 바라는 심리적 감시자 역할을 우리 스스로 세우면서 살아갑니다. 수퍼 에고가 공동체 질서를 지키고 개인의 안정을 이룩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해로운 점은 우리에게 이유도 없는 죄의식을 심어준다는데 있습니다. 게다가 남에게까지 자신의 수퍼 에고의 잣대를 들이대며 그대로 행동하고 생각하라고 강요합니다.

 

수퍼 에고와 인칭적 자아가 결합하면 나는 ~한 나이다.’라는 관념이 고착되어 자신을 벽에 가두게 하고 남을 돌아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남의 얘기를 잘 듣지 않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실패나 불화에서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이 아는 것으로 세상 모든 일을 분별하고 판단합니다. 거기에 안 맞는 것에 대해선 싫어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세상이 모두 자기 생각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고 믿는 셈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지탄하시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행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바리사이라는 말의 근원은 구별된 자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켜 죄로부터 구별된 자라는 자의식이 강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그럴만한 이유 여하를 떠나 모두 죄인이었습니다. 그들 생각에 죄인들은 현세에서 그리고 죽어서도 갖은 불행과 고난, 가난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죄인들 태도와 삶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죄인들과는 교류해서도 안 되고 구별하여 마땅한 것입니다.

 

현세에서 구별된 삶을 당연하게 여기고 산 사람들은 죽어서도 구별된 삶을 살아야 공평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라고 아브라함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심리학을 잘못 이해한 학자들이나 과학자들, 사람들은 수퍼 에고를 하느님이라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퍼 에고는 인간이 만든 신입니다. 가짜이며 우상입니다. 아빠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시지, 징벌하고 억압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편 가르기를 하시지 않습니다.

 

치누크 인디언은 인간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인간에게는 각자 능력과 힘, 지력에 차이가 생겨날 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고나 병으로 불행을 겪을 수 있음을 수긍했습니다. 그래서 그 차이를 공평하게 나누어 해소할 방법을 모색한 것입니다. 광활한 지역에 비해 거주민이 적었던 인디언 공동체는 열등한 부족민을 소외시키면 죽음만 가져오고, 그 결과 공동체가 와해될 것임을 체험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걸 공동체 무의식 층에 각인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기죽이지 않고, 또 명예로운 방법인 선물이라는 관습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각자 생명을 아빠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니 큰 선물을 받은 아버지의 자녀들도 본받아 무엇인 자기 것을 선물로 나누어 주어야 마땅합니다. 강제로 빼앗기고 잃는 것과 스스로 선물로 나누어 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쉬움이라는 찌꺼기가 끼지 못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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