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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25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복음 묵상 -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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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6-25 ㅣ No.112836




2017
06 25 () 가해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복음 묵상



신명기 30,1-5
에페소서 4,29-5,2
마태오복음 18,19-22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170625)


오늘 복음은 “둘이 땅에서 합심하여 청하는 것은 무슨 일이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과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이 두 구절을 분리해서 알아들으면의미가 없어집니다두 사람이 야합(野合)하면하느님이 들어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합니다두 사람이 합심하여 하느님에게 청하되그 합심의 동기가 예수님이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구약성서에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청하였고야훼라는 이름을 알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하느님이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셨다는 말은 당신을 부르는 백성이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람의 이름은 그 인물의 활동과 운명을 표현합니다우리의 문화권에서도 사람의 이름은 존엄한 것으로 생각되고사람이 소중한 그만큼 우리는 그 이름을 소중히 생각합니다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라고 하면예수님을 부르면서 그분의 활동과 운명을 자기들 생활의 지표(指標)로 삼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따라서 그들의 삶은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고그들을 보면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이 단편적으로 보인다는 말입니다그 사실을 오늘 복음은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 18장의 한 부분입니다마태오복음서 18장부터 20장까지는 교회에 대한 말씀들입니다오늘 복음은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합심한 사람들의 모임이고교회가 하는 기도는 하느님이 들어주시는데그들의 삶이 예수님의 삶과 운명을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예수님은 하느님이 어떤 자비와 어떤 용서이신지를 가르치셨습니다그 시대 유대교 기득권자들곧 율사와 사제들은 사람들을 쉽게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고성전에 제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아도 죄인입니다병들거나 불행을 당한 사람들도 모두 죄인이라 생각하였습니다그들은 그들 죄의 대가로 벌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유대교는 가르쳤습니다그들이 가르치는 하느님은 사람들을 판단하고벌을 주는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는 달리 하느님에 대해 가르쳤습니다하느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살리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예수님은 그 점에 있어서는 전혀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죄인으로 심판 받고사형을 당하면서도당신이 믿던 하느님에게 당신을 맡기고 죽어가셨습니다사람들은 그분을 죽였지만하느님은 그분을 부활시켜 살려 놓으셨습니다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신앙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후그 시대 로마제국 안에 급속히 전파되었습니다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인들은 자비와 용서로 채색된 예수님의 활동과 운명을 표현하는데 용감하였습니다세월이 흘러, 4세기 말에 이르자 그리스도신앙은 로마제국의 국교(國敎)가 되었습니다그와 더불어 교회도 그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었습니다. 4세기 말부터 소위 야만족이라 불리던 게르만족이 유럽 대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고그 혼란의 와중에 로마제국의 문화와 동일시된 그리스도신앙 공동체는 그 시대 지배층으로 남았습니다중세 유럽 봉건사회의 출현과 그것의 정착에 절대적 기여를 한 신앙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면서 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자비와 용서를 서서히 잃어 갑니다사회의 질서(秩序)와 기강(紀綱)을 위해서는 단죄(斷罪)와 벌()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예수님이 가르친 봉사가 아니라지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인간이 구상하는 효율성 뒤에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서서히 사라졌습니다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과연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이신지 물어 보아야 합니다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우리는 그분의 활동과 운명을 표현하는 사람들입니다자비와 용서를 위한 힘든 노력이 우리 안에 조금은 있어야 합니다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여러분들 가운데 둘이 땅에서 합심하여 청하는 것은...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습니다그것은 예수님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을 벌주는 분으로 가르치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말씀입니다그들이 함께 청하고 싶은 숙원(宿願)은 하느님이 용서하고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유대교 안에서 살아 온 사람들에게 이것보다 더 큰 청()은 없습니다그렇다면 그들이 “둘이 땅에서 합심하여 청할 것”은 당연히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이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말입니다. “주님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일곱 번까지 할까요?.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하시오. 예수님의 답입니다무한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용서에도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하느님은 흉내 내기 어려운 분이십니다우리는 두 번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느냐?’는 말이 있습니다하느님과 우리는 그렇게 다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도 ‘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어머니들이 자녀를 키울 때 자녀가 몇 번을 잘못해도 용서하고 새롭게 위해 줍니다그래서 어머니의 품 안에서는 연약한 생명들이 자라고 사랑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그런 사랑이 있기에 생명들이 태어나고 사랑을 배우며 자랍니다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면그런 용서와 그런 사랑을 살아야 한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6.25를 기념하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분단 후 70년이 넘었지만남북의 대치 상황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폭군의 통치 아래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허수아비와 같이 살고 있는 북녘의 우리 형제자매들이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날이 오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17062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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