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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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간 토요일]하늘 나라의 복음 선포 (마태 9,35─10,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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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19-12-07 ㅣ No.134376

[대림 제1주간 토요일]하늘 나라의 복음 선포 (마태 9,35─10,1.6-8)



 

 

이사야 예언자는 곤경과 고난 가운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의 예언을 전한다. (이사 30,19-21.23-26)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9 “예루살렘에 사는 너희 시온 백성아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
20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21 그리고 너희가 오른쪽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 때  뒤에서 ‘이것이 바른길이니 이리로 가거라.’ 하시는 말씀을  너희 귀로 듣게 되리라.
23 그분께서 너희가 밭에 뿌린 씨앗을 위하여 비를 내리시니  밭에서 나는 곡식이 여물고 기름지리라. 그날에 너희의 가축은 넓은 초원에서 풀을 뜯고
24 밭일을 하는 소와 나귀는 삽과 거름대로 까불러 간을 맞춘 사료를 먹으리라.
25 큰 살육이 일어나는 날, 탑들이 무너질 때  높은 산 위마다, 솟아오른 언덕 위마다, 물이 흐르는 도랑들이 생기리라.
26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 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

 

화답송 시편 147(146─147),1ㄴㄷ-2.3-4.5-6(◎ 이사 30,18 참조)
◎ 주님을 기다리는 이는 모두 행복하여라!
○ 우리 하느님을 찬송하니 좋기도 하여라. 마땅한 찬양을 드리니 즐겁기도 하여라. 주님은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시네. ◎
○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별들의 수를 정하시고  낱낱이 그 이름 지어 주시네. ◎
○ 우리 주님은 위대하시고 권능이 넘치시네. 그 지혜는 헤아릴 길 없네. 주님은 가난한 이를 일으키시고  악인을 땅바닥까지 낮추시네. ◎

 

예수님께서는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 그리고 열두 제자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권한을 주신다. (마태 9,35─10,1.6-8)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10,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 (이사30,19-21. 23-26)

 

 

"비록 주님께서 너희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20)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 하리라." (26)

  

이사야서 30장 18절, 19절에서는 징계중에 있는 남부 유다 백성들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기다리신다는 것 응답하여 주실 것임이 약속되었다.

 

이제 이사야서 30장 20절 이하 22절에서는 이러한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계시의 회복과 더불어 신앙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 예언된다.

 

먼저 이사야서 30장 20절과 21절은 이러한 계시의 회복이

스승들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 선언된다.

 

그 가운데 서두에 나오는 이사야서 30장 20절은 남부 유다 백성들이

이방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이다.

 

이것을 나타내는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해당하는 '레헴 차르 우마임 라하츠'

(lehem tsar umaim lahats; the bread of adversity and the water of affliction)

문자적으로 빵, 곤경 그리고 물, 고난이라는 의미이다.

 

원문에는 소유격을 나타내는 연계형이 사용되지 않았고, 빵과 곤경이 동격으로

그리고 물과 고난이 동격으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이라는 형태로 이해해야 본문의 앞뒤가 맞게된다.

 

빵을 먹되 곤경 가운데서 먹는 빵, 물을 마시되 고난가운데서 마시는 물은

사실상 곤경과 고난 그 자체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너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더 이상 숨어 계시지 않으리니,

 너희 눈이 너희의 스승을 뵙게 되리라'

 

본문은 주님께서 남부 유다 백성들에게 육체적인 고통은 주시지만,

영적인 은혜는 거두어 가시지 않겠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적으로 어려울 때에 이러한 영적 은혜마저 사라진다면,

그들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을 것이다.

 

그들이 고난의 때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스승이 남아 있어서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밝은 내일을 가르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본절에 나타나는 백성들이 비록 고난을 당하지만, 마음이

겸손하여 주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들은 이사야 예언자 당시 주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남부 유다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백성들과는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다.

 

한편 여기서 '너의 스승'에 해당하는 '모레카'(moreka)'스승'(교사)

의미하는 단수 명사 '모레'(moreh)에 2인칭 소유격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로서

'너의 스승'(your teacher)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어떤 영역본에서는 '스승'에 해당하는 영어를 대문자로 표기하여

'스승'이 주 하느님이심을 명확히 했고, 어떤 영역본에서는 '스승'에

해당하는 영어를 복수형으로 번역하여(your teachers) 본문의 '스승'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언자들임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이 두 가지의 번역이 어느 것은 틀리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레카'문자적으로 '너의 스승'이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백성들을 지도하시고 교훈하실 때 직접 하시지 않고

그의 예언자들을 통해 하시기 때문에, 동시에 '너의 스승들'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측면에서 본문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교훈하실 것임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 백성들의 영적 스승이 되는 것이다.

 

한편 남부 유다 백성들의 눈이 그들의 스승을 뵙게 된다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하느님을 뵙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자신들을 지도하시며, 하느님의 대리자인 예언자들을

보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다는 뜻이다.

 

예언자들은 그들 가까이에서 그들을 지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그들에게 매우 분명하게 가르칠 것이다.

 

이것은 이것을 듣는 남부 유다 백성들도 영안(靈眼)이 밝아져

하느님의 모든 뜻을 분명하게 깨닫고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 주시고,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 하리라.'(26)

 

여기서는 치유와 빛의 개념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강조되고 있다.

두 개념은 모두 주 하느님의 축복을 상징한다.

 

여기서 상처가 난 '당신 백성', 즉 '암모'(ammo; his people)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하느님의 모든 영적인 백성을 의미한다.

 

다만, 이사야 예언자가 당시의 남부 유다 백성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백성들, 즉 미래의 교회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이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들이 받을 '상처', 즉 '셰베르'(sheber; the breach of; the bruises of)

본래 깨뜨려 부수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 '샤바르'(shabar)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깨짐','부숴짐'을 의미한다(레위21,19; 잠언17,19).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살면서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주님 대전에 받은 징벌 뿐 아니라, 신앙 때문에 세상에서 당할

박해와 환난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말의 날에 그들의 모든 상처를 싸매주시며

치유해 주실 것이다.

 

또한 본절 후반부의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에 해당하는 '우마하츠 막카토'

(umahats makkatho; the wounds he imflicted)징벌을 당하고

환난을 당해 난 자리,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포괄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고치실 것을 약속하신다.

 

여기 '낫게'에 해당하는 '이르파'(irpha; heals)의 원형 '라파'(rapha)

일반적인 치료와 회복의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사람의 힘만으로

치료될 수 없는 질병이나 재앙이 내릴 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치유하시는 것을 나타낼 때 종종 사용된다(창세20,17; 탈출15,26).

 

이 단어에는 '용서'의 의미까지 함축되어 있으며(이사19,22; 53,5; 59,18),

이같은 하느님의 치유의 역사가 이루어졌을 때에는 다시는 아픔이나

눈물도 상처도 없는 완전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것이다.

 

끝으로, 본문은 주님께서 치유해 주시는 은총이 내리는 그날에 생겨날

놀라운 일이 예언되는데, 그것은 하늘의 대표적인 광명체인 달과 해의

빛의 광도가 더 커질 것임을 지적한다.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의 뜻은 밤이 소멸될 것이라는 사실을 연상하게 한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해석할 때, 진리의 빛이 과거에는 달빛처럼 희미했으나

이제는 해와 같이 밝고 찬란하여 누구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진리 안에서 거닐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아울러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져'의 뜻은, 히브리어에서 '일곱'(7)은 완전수로서

완벽함을 상징하므로, 햇빛이 더 이상 더 밝아질 수 없을 만큼

완전하게 밝아진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레 동안의 빛을 한데 모은 듯하리라'는 것은 하루의 빛이 일곱 번

더해지는 정도의 밝은 빛을 의미하며, 이것 역시 완전한 빛을 상징한다.

 

이러한 것들은 영적인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 진리의 빛이 찬란하게 비추신다는

사실과 더불어, 주 하느님께서 친히 이러한 완전한 빛이 되심으로써,

해와 달의 비추임이 필요없는 상태가 될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묵시21,23).

 

이것은 결국 종말의 날, 어두움의 세력인 악(惡)이 완전히 소멸되고,

오로지 빛과 진리만이 지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히

성취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대림 제1주간 토요일 복음(마태9,35~10,1.5ㄱ.6~8)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6)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he;

he was moved with compassion) '~을 불쌍히 여겨 마음이 움직이다'라는 뜻이다.

 

우리 말로는 '보기에 답답하고 딱해 걱정하고 안쓰럽게 여기다'이다.

 

이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느낌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죄와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있는 인간들을 향해서, 인간들을 지으셨고 또한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단순히 감정상의 측은함이나 연민의 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나아간다.

 

마태오 복음 9장 36절의 후반부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보고

가엾게 여기신 이유가 나온다.

 

이것은 구약의 즈카르야서 10장 2절 '사람들은 양 떼처럼 방황하고

목자가 없어 고통을 당한다'는 구절과 비슷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없는 양'의 이미지로 묘사하는 것은 신약의 여기뿐만 아니라

구약의 민수기 27장 17절, 역대기 2권 18장 16절, 열왕기 1권 22장 17절 등에서도

발견되는 드물지 않은 표현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결핍 상태에 있었고,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구심점도 없었다.

 

이런 차원에서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을 포함하는

온 우주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며, 방황하는 인간들을

바른 길로 구원할 약속된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이미지가

영적인 목자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 연민의 마음으로 함께함  
 

예언자 이사야는 귀양살이의 아픔과 서러움 중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고통의 때가 곧 끝날 것이라는 확신을 줍니다(이사 25,8 참조). 그는 하느님께서 탄원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리라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너희는 다시 울지 않아도 되리라. 네가 부르짖으면 그분께서 반드시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너희에게 응답하시리라.”(30,19-20) 

하느님께서는 ‘비록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시지만, 숨어계시지 않고’(30,20) 늘 내 인생길에 함께 해주십니다. 따라서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탄원은 주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이요, 주인이신 그분께 의탁하며 생명을 갈구하는 목마름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하느님의 마음으로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마태 9,35).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아무 조건 없이 모두를 품는 보편적이고 한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곁에 머문 이들만이 자유와 해방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9,36-37). 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내 앞의 대상에 대한 일시적이고 스쳐 지나가는 안타까움이나 동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앞의 대상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상대방과 온전히 동화되어 그의 아픔과 처지를 삼켜 함께 느끼고 아파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시달리는 이들’이 너무나 많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한(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 서민 빈곤층의 막막함, 농민들의 절규, OECD국가 중 노인 빈곤율과 자살율 1위를 기록하는 가운데 고통 받고 있는 노인층의 서러움, 거대 자본의 공룡화 속에 궁지로 내몰리는 골목 서민들의 한숨소리 등. 

이토록 아파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절규하는 이들 앞에 경제논리나 정치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몰인정함과 무자비함을 넘어선 폭력입니다. 거기에 가엾이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가면을 쓴 거짓말쟁이이겠지요.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돈도, 정치도 권력도 모두 사람을 위한 것 아닙니까? 

우리 모두 조건 없이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길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으로 온 세상 모든 이들을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10,1.5.8). 

오늘 예수님의 이 부르심을 듣고 연민의 마음으로 함께 울 수 있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주님! 존엄한 인간이 신음하고 비인간화 하는 현실을 보며 가엾음을 느끼지 못하는 나를 위해 울 수 있게 하시고, 권력의 마약에 중독된 정치인들과 돈에 눈먼 자본가들을 가엾이 여기게 하소서. 아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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