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화)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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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길, 생명의 길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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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damiano53] 쪽지 캡슐

2017-02-17 ㅣ No.110150

2017.2.17.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창세11,1-9 마르8,34-9,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죽음의 길, 생명의 길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의 장면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전자는 죽음의 길을 보여주고 후자는 생명의 길을 보여줍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죽음의 길, 생명의 길’로 정했습니다. 

문득 어제 말씀 중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리라.”(시편102,ㄴ).


화답송 후렴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살펴 보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7장13절 말씀도 생각납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천상으로부터 매시간 항상 자신을 내려다 보시고, 

자신의 행동을 하느님께서 어디서나 살펴보시며, 

또 천사들이 매시간 보고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어 베드로를 꾸짖던 예수님 말씀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여 당신의 길을 가로막던 

무지無知에 눈 먼 베드로를 당신 뒤에 자리잡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땅을 굽어보시던 주님께서 오늘 창세기의 현장에 개입하십니다.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도시의 집단문명사회를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공동체가 아닌 눈먼 집단사회입니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는 이들이 하나로 모인 

참 답답하고 막막한 맹목적盲目的 획일적劃一的 집단입니다. 


눈이, 방향이 없는 집단입니다. 

영혼이 없는 건물이요 도시같습니다. 

깊은 내적공허와 두려움을 반영합니다. 

내적 공허와 두려움은 저절로 이런 눈에 보이는 가시적 표현을 찾기 마련입니다. 

마치 오늘날 끊임없이 위로 치솟는 무수한 고층건물들이 즐비한 도시를 보는 것 같습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자.”


인간의 본질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이들의 내면에는 깊은 내적공허와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깊은 두려움이 깔려 있음을 봅니다. 

두렵고 외롭기에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두려움과 외로움은 인간의 근원적 정서입니다. 

하느님 빠진 그 자리에 어김없이 자리 잡는 내적 공허와 절망, 두려움과 외로움입니다.


말 그대로 맹목적입니다. 

고유한 개인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無知와 교만驕慢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침내 주님은 파멸의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현장에 개입하셔서 성읍을 쌓는 일을 중단시키고 

온 땅으로 흩어 버림으로 모두를 살려 내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와 대조적으로 생명의 길을, 획일적 집단이 아닌 다양성의 일치 공동체의 길을 보여줍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밖으로의 눈길을 안의 자기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각자 활짝 열린 눈으로 제 삶의 자리를 돌아 보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외 없이 모두가 따라야 할 방향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일치의 중심입니다. 

막연히 버리고 떠나기가 아니라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입니다. 

다양성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제1독서의 창세기의 사람들은 이런 인간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빠져 있습니다. 

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부단히 자기를 버리고 책임적 존재가 되어 제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자기실현의 길은 이 십자가의 길 하나뿐입니다. 

주님 향한 사랑으로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믿는 믿음의 힘으로 제 십자가를 지고 희망의 주님을 따르는 여정의 삶입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의 향주삼덕이 삶의 원동력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무의미와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저변에 깊이 스며 들어 있는 허무주의, 니힐리즘Nihilism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잊은 업보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막연한 질문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로 물음을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외적으로 바벨탑을 쌓는 삶이 아니라, 

내적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구원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일에 항구할 수 있는 믿음과 희망, 사랑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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