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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7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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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수 [sooyaka] 쪽지 캡슐

2017-11-24 ㅣ No.116389

 

그리스도 왕 대축일. 20171126.

마태 25, 31-46.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라 일컫는 것은 그분이 이스라엘이 과거에 고대하던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왕으로 와서 세상 만방을 통치하는 강대국 이스라엘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그런 믿음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으면서 제자들은 그분이 열어놓은 구원의 새로운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로마 6,4)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구원은, 유대교가 주장하듯이,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을 잘 바쳐서 받는 보상(報償)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으로 한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이 보여 주신 새로운 삶을 사는 데에 구원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옛날에는 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백성은 왕의 나라에서 왕이 공포한 법을 지키며, 왕이 제시하는 가치관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제시한 가치관을 따라 삽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기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을 왕이라 일컬었습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보여준 가치관을 따라 살겠다고 약속합니다.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은, 그분의 자비와 보살핌의 생명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에는 왕이 없습니다. 국가는 이제 왕이 통치하지 않고, 백성이 나라를 위해 일할 일꾼들을 뽑아 통치하게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임금님의 나라에서 황공하게 살지 않고, 자기 나라에서 당당하게 삽니다. 아직도 왕이 있는 나라들이 있지만, 그런 나라에서도 이제 왕은 통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의전(儀典)을 위한 상징적 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옛날, 왕이 당연히 있고, 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그리스도 왕이라는 칭호가 생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칭호를 축일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린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삶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최후심판 이야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리는 비유 이야기였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열거된 사람들은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들입니다. 모두가 어려움에 처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쉽게 외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보살피며 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보듯이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이웃을 최선을 다해 보살피는 데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을 사는 길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의 벽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도 하느님 앞에 스스로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유대교는 굶주리는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는 모두 하느님이 버렸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이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구실만 있으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이 굶주리는 이를 보면서, 옷을 잘 입은 사람이 헐벗은 이를 보면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잘 지키지 못하는 이를 보면서, 우월감을 느낍니다. 예수님 시대 율사와 사제들은 율법과 제사의례를 구실로 많은 이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면서, 자기들 스스로는 의인이라는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거부하셨습니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스스로 우월감을 가질 수 없는 이들, 이 보잘것없는 형제 중에 하나에게 해 준 것이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우월감을 가질 수 없는 이들입니다. 물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지도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연민과 보살핌만이 그들을 동료 인간으로 인정합니다. 연민과 보살핌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실천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은혜로운 체험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에게로 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계명(誡命)과 성사(聖事)에 충실하면, 하느님이 축복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축복하시면 재물도 권력도 얻어 누린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갖고 더 높아지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 얻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얻어내는 비결을 가르치는 그리스도 신앙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최후만찬에서 당신의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한”(마르 14,24)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는그리스도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이 주변 사람들을 위한 축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차별이나 우리의 우월감을 조장하는 계기가 된다면, 그리스도 왕으로 계시는 새로운 나라 혹은 새로운 삶이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축복하시면, 우리 안에 이웃을 향한 연민과 보살핌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면서 유대교가 만들어 놓은 차별을 없애고 연민과 보살핌을 실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으로 들은 최후심판 이야기는 우리도 인간 차별을 없애는 연민과 보살핌을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이를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주는 것은 이 세상이 만들어 놓은 차별을 없애는 축복의 몸짓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삶은 그런 실천들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우리가 고백할 때, 그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을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잘 되고 존경 받고 우월감을 갖는 삶이 아니라, 연민과 보살핌으로 자기 안에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일이 실현되게 하면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고백의 몸짓들을 구체적 이야기 안에 담았습니다. 복음은 법이 아닙니다. 법은 우리 삶의 향기로움을 빼앗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구원의 새로운 삶, 향기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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