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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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11 -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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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10-10 ㅣ No.115338




2017
10 11 () 가해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Wednesday of the Twenty-seventh Week in Ordinary Time
(
성 요한 23세 교황 기념일)

요나서 4,1-11 / 갈라티아서 2,1-2.7-14
루카복음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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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홀수 해)


▥ 요나서 4,1-11

1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다. 2 그래서 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말씀하셨다. 5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
6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오르게 하셨다. 그러자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다. 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7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시니, 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렸다.
8
해가 떠오르자 하느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셨다. 거기에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9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11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Reading 1


Jon 4:1-11

Jonah was greatly displeased and became angry that God did not carry out the evil he threatened against Nineveh.
He prayed, "I beseech you, LORD, is not this what I said while I was still in my own country?
This is why I fled at first to Tarshish.
I knew that you are a gracious and merciful God, slow to anger, rich in clemency, loath to punish.
And now, LORD, please take my life from me; for it is better for me to die than to live."
But the LORD asked, "Have you reason to be angry?"

Jonah then left the city for a place to the east of it, where he built himself a hut and waited under it in the shade, to see what would happen to the city.
And when the LORD God provided a gourd plant that grew up over Jonah's head, giving shade that relieved him of any discomfort, Jonah was very happy over the plant.
But the next morning at dawn God sent a worm that attacked the plant, so that it withered.
And when the sun arose, God sent a burning east wind; and the sun beat upon Jonah's head till he became faint.
Then Jonah asked for death, saying, "I would be better off dead than alive."

But God said to Jonah, "Have you reason to be angry over the plant?"
"I have reason to be angry," Jonah answered, "angry enough to die."
Then the LORD said, "You are concerned over the plant which cost you no labor and which you did not raise; it came up in one night and in one night it perished. And should I not be concerned over Nineveh, the great city, in which there are more than a hundred and twenty thousand persons who cannot distinguish their right hand from their left, not to mention the many cat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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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독서 (짝수 해)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2,1-2.7-14

형제 여러분, 1 십사 년 뒤에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2 나는 계시를 받고 그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7
그들은 오히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 받았듯이, 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8 할례 받은 이들을 위하여 베드로에게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나에게도 다른 민족들을 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9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10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11
그런데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3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14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Reading 1


GAL 2:1-2, 7-14

Brothers and sisters:
After fourteen years I again went up to Jerusalem with Barnabas, taking Titus along also.
I went up in accord with a revelation, and I presented to them the Gospel that I preach to the Gentiles
? but privately to those of repute ? so that I might not be running, or have run, in vain.
On the contrary, when they saw that I had been entrusted with the Gospel to the uncircumcised, just as Peter to the circumcised, for the one who worked in Peter for an apostolate to the circumcised worked also in me for the Gentiles, and when they recognized the grace bestowed upon me, James and Cephas and John, who were reputed to be pillars, gave me and Barnabas their right hands in partnership, that we should go to the Gentiles and they to the circumcised.
Only, we were to be mindful of the poor, which is the very thing I was eager to do.

And when Cephas came to Antioch, I opposed him to his face because he clearly was wrong.
For, until some people came from James, he used to eat with the Gentiles; but when they came, he began to draw back and separated himself, because he was afraid of the circumcised.
And the rest of the Jews acted hypocritically along with him, with the result that even Barnabas was carried away by their hypocrisy.
But when I saw that they were not on the right road in line with the truth of the Gospel, I said to Cephas in front of all,
If you, though a Jew, are living like a Gentile and not like a Jew, how can you compel the Gentiles to live like J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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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복음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Gospel


Lk 11:1-4

Jesus was praying in a certain place, and when he had finished, one of his disciples said to him, "Lord, teach us to pray just as John taught his disciples."
He said to them,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sins for we ourselves forgive everyone in debt to us, and do not subject us to the final 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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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7 10 11일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이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면, 기도는 호흡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앞서 사랑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루카 10),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중요하게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우리 신앙의 요약이며 압축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의 핵심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오시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한편 기도의 중요성은 잘 알지만, 그리 쉽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그분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그분의 뜻대로 내 삶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을 온전히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안의 미움과 좌절 뿐만 아니라, 내가 바라는 희망과 기쁨 마저도 온전히 주님과 일치하고자 그분께 내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 바로 첫걸음은 용서입니다. 내 마음 안에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 이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용서받기 위한 출발점이고, 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화해와 평화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구원 의지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응답이어야 하고, 우리의 모든 윤리적 행동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분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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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6 1005일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숨결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가 숨 쉬는 것처럼 쉽다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별도의 장소와 시간이 필요하다거나, 기도는 특별한 방식을 알아야 할 수 있는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느끼는 신자들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당대의 여러 예언자들이나 율법 교사처럼 예수님께 멋진 기도 방법을 배우고 싶어 했나 봅니다. 명색이 메시아로 추앙 받던 예수님의 제자인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참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용기,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고, 그분이 이끄시는 나라를 희망하는 일이 기도의 시작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과 늘 우리 삶을 괴롭히는 죄의 용서와 회개를 청하는 일, 그리고 피하기 힘든 유혹을 이길 수 있게 해 달라는 청을 하는 것이 우리가 바쳐야 하는 기도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는 단순히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도구이거나, 신자로서의 의무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베드로의 위선적 행위를 공박하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 속에서, 베드로 역시 선택된 사람이지만, 인간적인 약점으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 기도의 결실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예언자적 가르침을 받습니다.
기도는 결코 선택된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단순한 말로 바쳐질 때 결실을 맺습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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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5
1007일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하느님의 말씀을 피하여 요나가 줄행랑을 친 이유가 오늘 독서에서 밝혀집니다. “아, 주님!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분’이시라는 사실은 탈출 34,6-7에서 이미 선포된 그분의 이름이며 속성이기도 합니다.
니네베는 아시리아의 수도이고 아시리아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인데, 원수인 니네베에게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싫어서 요나는 그분께 화를 냅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요나서는 에즈라 시대에 유배에서 돌아와 너무 자신들에게만 갇혀 살던 유다교의 경향을 비판하는 예언서로 평가됩니다. 예언자는 우선적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의지를 확신한 사람으로서, 통상적으로 악을 고발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방인들에 대하여 모두 배타적인 분위기였기에, 예언자 혼자서 이방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을 역설하게 되면 시대를 역행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도 있어 이것 또한 고통스러운 일이었겠죠.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지만, 벌레 하나가 아주까리를 쏠아 먹어 시들어 버립니다. 게다가 해가 떠오르고 뜨거운 동풍이 불어오자,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합니다. 물론 익살스러운 표현입니다만, 아주까리 때문에 투덜거리는 요나와,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살고 있는 니네베의 회개와 구원을 위하여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이 매우 대조적이며 훌륭한 묵상 내용이지요.
주님의 기도에서도,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와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용서는 서로 닮아서 나란히 갑니다.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그가 돌아서서 사는 것을 바라시는(에제 33,11 참조)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마음을 깨달을 때, 우리도 그 하느님께 배운 자비와 용서를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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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4 1008일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단순하면서도 완전한 기도를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러나 공허하게 입으로만 바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마태오 복음의 병행 구절(6,9-1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보배로운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말라.’고 타이르십니다(6,7 참조). 그러니 마음가짐이 단순하고 한데 모아질 때 비로소 그 기도가 곧바로 하느님 아버지를 향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필요한 단순함과 진실함에 대하여 성찰하다가 문득 한국 서양화의 거장 장욱진 화백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양주에 그의 미술관이 개관했다는 소식에 반가운 마음으로 찾았던 것이 바로 지난여름입니다.
숲을 배경 삼아 소박하고 단순하게 세워진 미술관 건물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개관 특별전에는 귀한 작품이 많았는데, 서울 한복판의 전시 때와는 달리 넉넉한 공간에 잘 전시된 데다가 사람도 적어 차분하게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그림들을 오래 감상하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며 단순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장욱진 화백은 주로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박한 소재들을 그리면서 이상적인 내면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작품 세계처럼 그의 검소한 일상을 보여 주는 사진과 화구, 생활용품은 제 삶의 모습을 깊이 돌아보게 하였습니다.
“가장 진지한 고백, 솔직한 자기의 고백이라는 진실을 사람들은 일생을 통해 부단히 쌓아 나가고 있나 보다. (중략) 나는 이제껏 그림이라는 방법을 통해 내 자신의 고백을 가식 없는 손놀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 장 화백의 ‘덕소 시대’의 삶을 잘 드러내는 수필집 『강가의 아틀리에』 머리말의 한 부분입니다.
‘단순하면서도 대담했던’ 그의 삶과 예술은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의 내면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림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와 함께 일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매일 반복해서 바치는 이 기도가, 허세와 안달이 아니라 진지하고 단순한 고백이자 주님에 대한 투명하고 조건 없는 의탁일 수 있도록 늘 마음가짐을 새로이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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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31009일 한재호 루카 신부님)
(
성 디오니시오 주교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
성 요한 레오나르디 사제 기념일)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주십사고 청합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에도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들려주는 체험이 있습니다.
부제품을 준비하며 열흘 넘게 대침묵 피정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피정으로 크나큰 감동을 맛보고 많이 변화된 선배들을 보아 왔기에 저 역시 그 피정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그래서 피정 내내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도 감동은커녕 고달프기만 하였습니다. 물론 깨달음이 오기는 하였지만 부제품을 앞둔 사람의 삶 전체를 받쳐 줄 정도의 확고한 깨달음은 아니었습니다.
피정 막바지에 저는 지도 신부님에게 피정 내내 겪어야 했던 메마름과 실망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기도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지도 신부님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가 만족을 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시간을 내어 당신과 함께한 것에 대해 너무나 기쁘게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십시오.” 피정이 끝날 때만 하더라도 큰 감흥이 없는 듯해 아쉬움이 많았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켜 보니 그 피정이 다른 어떤 피정보다도 가장 뜨겁고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기도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도 안에서 갈증을 해소할 오아시스를 만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순간의 갈증을 풀어 주는 기도가 반드시 좋은 기도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사막을 가로지르는 듯한 메마름을 느끼면서도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이어 나가는 기도가 더욱 값진 기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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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210 10일 전숭규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토머스 그린 신부가 기도에 대해 쓴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라는 책을 근래에 읽었습니다. 두껍지도 않으면서도 읽기에도 쉬운 책입니다. 이 책은 기도 생활의 단계와 영적 성장의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도달하는 최고의 경지는 하느님께 우리를 통째로 맡겨 하느님의 이끄심에 유연하게 따르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상태를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바다에 나를 맡겨 파도를 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토머스 그린 신부는 기도의 단계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기를 들어 설명합니다. 청춘 남녀의 “당신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주니까 당신과 결혼할래요.”라는 말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입니다.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는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니 나도 정말 행복해. 여보, 당신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야. 그것이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이지.” 하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사람도 하느님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숙한 기도로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면 하느님의 뜻을 원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피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의무적으로 행하는 것은 하느님을 충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기에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하느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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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1 1005일 전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는 신앙인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축약되어 있는 가장 소중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외우고 있고 수없이 바치며 살아갑니다. 이 기도와 관련하여 우루과이의 어느 작은 성당 벽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이 글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기도와 동떨어진 행동을 하며 살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마라. <늘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마라. <늘 혼자만을 생각하면서>
‘아버지’라고 말하지 마라. <한 번도 아들딸로 산 적이 없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늘 자기 이름을 빛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지 마라. <늘 내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말하지 마라. <먹고살 재산을 다 축적해 놓았으면서>
‘저희가 용서 하듯이’ 하고 말하지 마라. <늘 미움과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지 마라. <늘 죄지을 기회를 찾으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응답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친 적도 없으면서>
여기에 쓰인 주님의 기도 구절 가운데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는 구절이 하나라도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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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10 10 06)
(
성 브루노 사제 기념일)


기도(祈禱)는 본디 제단 앞에 손을 도끼날처럼 모아서 빌며〔祈〕, 제단에 목숨〔禱〕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하늘에 목숨을 맡길 정도로 온 정성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목숨을 걸고 하느님께 자신이 놓인 현실을 말씀드리고,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조용히 경청하는 행위이지요.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라고 말합니다. 인간 사이의 대화를 기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한 것을 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사고 청합니다. 사실 주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은 이미 기도 속에 머물러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주님과 날마다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기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제자들이 보기에는, 세례자 요한과 그 문하생들이 바치는 거창한 행위가 곧 올바른 기도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청을 들으시고는, 우리가 즐겨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일상에서 욕심을 내지 않으며 사랑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지만, 실제로는, 주님을 사랑하고, 일상의 생활을 사랑의 삶으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욕구와 욕망만 채우려 들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위선적인 바리사이들과 똑같아집니다. 이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올바른 기도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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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9 10 07)
(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


‘주님의 기도’만큼 위대한 기도는 없습니다. 서슬 시퍼런 율법의 시대에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목숨을 내건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했고 제거하려 했습니다. 율법을 훼손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과 대화함을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요? 아이들은 그냥 ‘엄마, 아빠’를 부릅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왜 부르는지 압니다. 어린이의 대화는 이렇듯 부모님을 부르는 것이 거의 전부입니다. 몇 마디 하지 않아도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애정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 앞의 어린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기도는 계속해서 아버지를 부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냥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말만 되풀이해도 훌륭한 기도가 됩니다. 다만 미운 감정을 ‘없앤 뒤’에 기도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이 말씀이 암시하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미움을 체험합니다. 심한 경우 ‘이를 갈고’ 보복을 맹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감정을 딛고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무슨 유혹이겠습니까? 미움을 합리화하고 용서에 ‘핑계’를 대는 유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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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8 10 08)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제자들의 청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남기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청하며 날마다의 양식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누구나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칩니다. 생각 없이 외우는 날도 있고, 마음을 가다듬고 바친 날도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주님의 기도’를 잘 외웁니다. ‘아버지’란 단어 때문일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기에 편하게 외우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아버지이신 주님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성경 책에만 계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사와 무관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언제라도 유혹입니다. 그러기에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 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따듯한 아버지이십니다. 허물을 알면서도 은총으로 덮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주님을 기억한다면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애정과 헌신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자녀이며 친구이며 예전의 동료들입니다. 그들을 다시 아버지의 마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담긴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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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07 10 10)


우리는 그 어떤 기도보다도 ‘주님의 기도’를 자주 바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고 있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뚜렷이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막연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탓이 아닐는지요? 이 기도에 담긴 참뜻을 깨닫는다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까닭을 이해할 것입니다.
돼지를 치는 일을 하고 있는 야고보 씨는 날마다 할 일이 참으로 많기만 합니다. 그는 기계화된 전문 시설을 갖춘 것이 아니라 돼지를 우리에 가두어 놓고 돈 될 만큼 키워 파는 사람입니다. 40년을 그렇게 살아온 야고보 씨가 영세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아내가 죽은 뒤 술독에 빠진 그는 성당에 다니는 친구들의 인도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는 일이 너무 많아 예비 신자 교리반에도 들쑥날쑥한 그였지만, 세례를 받은 뒤로는 주일 미사에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가 외울 수 있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가 전부여서, 하루에도 이 주님의 기도만 자주 바친다고 합니다. 특히 일이 고되거나 아내 생각이 간절하면 이 기도를 바치고 또 바친답니다.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에 아내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밝아진답니다.

주님의 기도 중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에서, 빠지지 않아야 할 유혹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소홀히 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유혹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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