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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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217 -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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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 [kjh2525] 쪽지 캡슐

2017-02-17 ㅣ No.110145



2017
02 17 () 가해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복음 묵상


창세기 11,1-9

마르코복음 8,34-9,1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
자기 자신을 버리고 >


그러고서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또한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온 세상을 벌어들인다 해도 제 목숨에 손해를 본다면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실 사람이 제 목숨의 대가로 무엇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다면 이제부터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세주로 믿고 그분만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가시는 길은 순탄한 길이 아니라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시어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지금과 같은 자세로는 안되고 새로운 결단 즉 나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먼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뀐 사람이요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즉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님 없이 부유하게 살고 권력을 누리고 부유하게 사느니 차라리 예수님과 함께 가난하고 겸손하고 모욕을 받는 한이 있어도 그분과 함께 있기를 갈망하면서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버림을 받고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장 큰 위험은 예수님이 제시한 길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자기 생각을 갖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으시어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은 항상 어디에서나 우리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잡아주는 잣대가 되고 우리 안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기준이 된다.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내려 주신 것으로서 내가 참된 신앙인인가 아닌가를 식별하게 하는 기준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예수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예수가 아니다.

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예수는 자기 멋대로 만들어 놓은 예수를 자기 방식대로 따르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예수를 따르는 삶의 방식이 있고 조건이 있다. 예수님이 제시해주신 방식과 조건을 채우지 못할 때 그것은 참된 신앙인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시해주신 조건을 갖추고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이고 특성이다.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완전히 실현시키는 것으로서 모든 악의 뿌리가 되는 거짓 자아를 벗어 던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파괴시키고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것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내가 입어야 할 옷이 아니라 입지 말아야 할 옷들이었다. 이제는 거짓 자아를 벗어버리고 우리를 살리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가 입고 있었고 또 입고 있는 낡은(거짓) 옷을 버려야 한다. 마치 새살이 돋기 위해서는 곪아 썩어 들어가는 환부를 잘라내야 하듯이 버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작아진다는 것을 바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자가 되고 강한 자가 되려고 하고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속이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위대해지는 것은 하느님의 눈에 귀중한 존재이고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때만이 실현된다.

누구를 눈치보고 또 누가 이야기를 하니까,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에게 손해가 되고 불이익이 돌아오니까, 체면 때문에 신앙 생활을 하고 무엇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와 가난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베풀고 봉사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를 버리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방해가 되는 것,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는 역행하는 것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기"가 가장 커다란 방해이고 장애물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전의 모든 삶은 자기를 따른 삶이었다. 즉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행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가고, 싫으면 가지 않고, 나의 취향, 나의 성격, 나의 계획, 등 모든 것은 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온 삶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런 자세로서는 도저히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계획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 그리스도의 계획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 즉 이제부터 내 인생의 주인은 ""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예수님에게로 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자기 자신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가치전환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이다.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애물로 여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필립 3,7-9) 결국 자기를 버리라는 것은 자기로 갇혀 있지 말고 자기보다는 더 크고 위대한 그리고 넓은 분에게로, 더 넓은 세계에로 투신하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려고 할 때 당연히 따라 오는 것은 자기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다. 그 동안 익숙했던 사람을 포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동안 우리의 삶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었고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취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 것이다. 그 십자가는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반드시 자기 자신이 지고 가야 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면 좋겠다."라는 권고의 말씀이 아니라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강력한 명령이다.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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