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이해욱 신부의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 "새로운 영성"이 아닙니다

스크랩 인쇄

김리다 [pharm8891] 쪽지 캡슐

2018-03-07 ㅣ No.118806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새로운 영성"이 아닙니다 (2010, 08, 21)


어떤 분께서는 제가 전하는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영성"이라고 생각하거나 말씀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러나 분명히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제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서 그렇지, 결코 어디서 새로 생겨나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새로운 영성"이 전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분은 "루이사 피카레타의 하느님 뜻 영성"을
흉내 내서 만든 새로운 영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영성,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긴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저는 처음에 지금 이곳 지리산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던 초기에는
제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을 그 어떤 "영성생활"로 이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산으로 들어온 목적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단지 저의 병든 몸도 고치고, 병든 영혼도 고쳐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그런 생활을 해 보고자 한 것이 바로 그 목적이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서울대교구 사제휴양원 원장직을 맡게
되면서부터는 이곳에 휴양하러 오시거나 개인 피정을 하러 오시는
신부님들을 돌보아 드리는 일이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소명이리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의 "소명"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명"을
주님께서 저에게 주셨음을 알게 된 것은 불과 2년 전의 일입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들어오기 전  저의 영육은 모두 망가진 상태였고,
그래서 저는 지리산의 어느 조그만 절에서 30일 단식기도
(15일씩 단식과 보식)를 하면서 큰 깨우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저의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릴 것을 아주 굳게 결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는 "저의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릴 것"을 결심했다고 생각했는데,
"버린다"는 표현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임을,
그 "버린다"는 말보다 "맡긴다"는 말이 더 우리에게 더 알맞고 정확한
 표현임을 한참 나중에서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존재를 부정하는 불자(佛子)들의 입장에선
무(無)와 공(空), 어느 곳에도 다 버릴 수 있겠지만,
그래서 그분들에겐 "버리거나 내려놓는다"는 표현이 참으로 알맞는
 용어가 될 수 있겠지만,
하느님을 신앙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맞지 않는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그 모두가 사실은 자기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지식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는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아무데나 버리거나 내려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버려도 하느님께 버리고,
내려놓아도 하느님께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버릴 곳도, 내려놓을 곳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버리다, 내려놓다"라는 말보다 버리고 내려놓는 곳의
 주인이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 맡겨 드리다"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정말 엄청난 영적충격을 던져 주었던
"하느님 섭리에 내맡김"이라는 책과 "거룩한 위탁"이라는 책을 통하여
그때 비로소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영성(靈性)"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과연 "영성"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저는 과거엔 "영성"이라는 단어와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해오던
사람 중의 "대표"였습니다.


영성이라는 말은 영성신학을 공부한 영성신학자나 쓰는 말인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성"이라는 말이 저에게는 늘 참으로 부담스럽고
 무겁게만 느껴졌습니다.


과거에 제가 읽었던 영성책자도 모두 "강론 준비"를 위한 하나의
자료수집 과정이었지 저의 영적 성숙을 위한 그 어떤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그러하던 제가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이니 "무슨 영성"이니,
영성생활이 어쩌구 저쩌구 떠들고 다니는 지금의 저의 모습이
참으로 제 자신 스스로도 믿겨지지 않는 "웃기는 짜장면"입니다.


하느님은 쩡말로, 쩡말로 "욱끼시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웃기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미 다른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느님께서 저에게 알려주신
당신의 모습은 지금까지,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시고, 오묘하시고,
놀라우시고, 위대하시고, 희한하시고, 웃기시는 모습"이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저를 알고 있는 친구 신부들을 비롯한 모든 신자분들
앞에 정말로 "욱끼는 짜장면"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원래 저는 친구들을 잘 웃깁니다.
웃겨 왔습니다, 여러모로 말입니다.


웃기는 제가 느낀 "영성"에 대해 한 말씀 올려 드린다면,
"영성"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기냥 "하느님을 싸랑하믄서 살믄 되는 거"라는 것입니다.


 "영성! 영썽! 영썽!"을 아무리 떠들고 외쳐대도
영성을 살지 못하믄 영썽이 "썽"을 내고 오히려 싸람들을 잡아먹으려
 대들게 될 것입니다.


영성을 외치는 분들께 이 기회에 부탁 한 번 드려 보겠씸더!
"싸람들에게 "영성"을 제발 너무 어렵게 알려 드리지 마시길"바랍니다.


영성은 기냥 살믄 되는 것입니다.
어케?
아까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을 쩡말로 뜨겁게 싸랑하도록 하게" 하여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도록 하믄 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쩡말로 싸랑하십니까?
하느님 때문에 맨 날 눈물을 짜고 계십니까?
하느님 싸랑으로 가심이 뜨겁게 달아오르십니까?
아하~~~ 그렇타고요?
기러믄 당신은 하느님의 백썽, 평신도들에게
"영성"을 말하고 가르칠 자격이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당신을 정말 존경합니다.
그러한 당신을 저는 만나고 싶고 당신과 대화를 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리고, 저를 지도해 주시기를 정말로 원합니다.


참으로 영성은,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여 받들고,
그분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고,
그분만을 사랑하며,
그분과 뜨거운 사랑을 서로 나누며 사는 것"
그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님을 널리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성신학"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학문이 되어야지,
"하느님을 가르치는 학문의 가르침"이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앎"을
방해하고 어렵게 해서는 절대로 아니됨을
이 기회에 하느님을 가르치는 많은 교사들께 정말 크게 강조하고 싶습니다.


영성을 가르치는 교사가
"영성을 사는 것"이 곧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교사가 사는 삶이 곧 "신학(神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성신학을 공부해 보지도 못한 -제 기억에 신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없으면 안 배운 것이고, 사실 교과과정에도 빠져 있었으며, 구약과정도
리포트로 대체한 신학교 교육과정을 이수한- 무식한 신부가 용감해서
 마구 떠들어 대고 있음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알고 배우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더 알고 배우려 신학교나 신학원을 찾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야 더 알게 되고 배울 수 있는 하느님이라면,
그런 하느님은 믿을 필요가 없는 하느님입니다.
공부해야 알 수 있는 그런 하느님은 이미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지식"의 하느님이 아니시고 분명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대가리"로 얻을 수 있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뜨거운 가슴"으로 느껴야 얻어지는 그런 분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듯이 뜨겁게 사랑할 때 얻어지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적어도 저의 경우는 그렇습니다.


유아세례 후 지금까지 오십여 년을 살아오면서 얻은 저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결론입니다.


당신의 결론은 어떠하시다고요?
당신의 그 결론으로 하느님을 얻으셨으면 그 결론을
대중께 알려 드려야 합니다. 물론 저에게도 알려 주시고요. 
당신이 얻으신 하느님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영성신학(靈性神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제가 얻게 된 하느님!
하느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입니다.
저는 "내맡김"을 했고 "내맡김의 삶"을 살기에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절대로 "새로운 영성"이 아닙니다.
제가 만들어 낸 영성도 아니요, 어디서 만들어진 영성을 각색한
것도 아닙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모든 영성의 원조"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알파요 오메가 입니다."와
"<斷想> 23. 평생 딸랑 이거?"를 이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제가 이곳 지리산으로 들어와
5년에 가까운 생활 속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저를 이끌어 주시어 당신을 깊이 체험케 해 주신
참으로 고귀한 저의 "체험"에 의해 나오게 된,
"저와 하느님과의 사랑 이야기"임을 알려드립니다.


저의 "그님과의 러브 스토리"를 잘 읽어보시면,
여러분도 "그분과의 러브 스토리"를 써 나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러브 스토리를 저처럼 다른 분들에게 힘차게
그리고 훌륭히 전하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전국을, 아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함께 퍼트릴 그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하느님께서 그것을 간절히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다.


http://cafe.daum.net/likeamaria/


(소리로 듣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862 2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