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3일 (화)
(백)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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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것이다."-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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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문숙 [moon6388] 쪽지 캡슐

2018-05-10 ㅣ No.120364

 

 

요한 16,16-20(부활 6주 목)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이 떠남과 다시 오심에 대한 말씀을 주지시키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앞 구절>조금 있으면이란 단어는 오늘 복음에서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짧은 시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뒤 구절>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단어는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 혹은 재림의 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시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당신의 죽음을 준비시키고자 애쓰시지만, 정작 제자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근심과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이는 근심이나 슬픔이 지나가면 기쁨이 온다.’는 고진감래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슬픔이나 근심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슬픔 다음에 기쁨이 온다는 것이 아니라, 슬픔 그 자체가 기쁨으로 변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를 간혹 체험합니다. 예를 들면, ‘격고 있을 때는 아픔이었지만, 뒤돌아보니 지나온 발자국마다 은총이었구나!’ 하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이 열리면, 슬픔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은 슬픔의 원인이 되고, 동시에 기쁨의 근원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슬픔인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은 기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슬픈 일 자체가 기쁜 일로 바뀐다는 이 사실, 곧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이미 살아계신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는 기쁨이 가득 차 있는가?

 

슬프게도 우리에게는 그때 그 제자들처럼, 여전히 슬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고, 성령이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근심과 슬픔에 젖어들곤 합니다.

아직도 우리의 눈이 열리지 않아 보지 못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희망에 대해 절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손실에 대해 슬퍼하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를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베풀어진 자비를 관상하면서, 동시에 그곳으로부터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선사를 여전히 받아야 할 일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와 있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요한 16,22)이 있는데도, 덮어만 두고 있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더구나 이미 주어졌건만,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더 더구나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줄도 모르는 자신에 빠지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만약 우리가 지금 근심과 슬픔에 빠져 있다면, 바로 그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먼저 베푸신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관상하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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