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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서 바라보는 한국은 아시아의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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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램 [good79] 쪽지 캡슐

2018-10-20 ㅣ No.93770

 

[장벽 너머 사람들을 만나다 ⑪]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

 

 


남북미의 평화를 향한 움직임은 올 한해 내내 한반도를 넘어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은둔의 독재자에서 정상국가의 지도자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였고, 전쟁을 불사하겠다던 트럼프 대통령도 문재인 대통령과 발걸음을 함께 하며 북한과 타협의 문을 열려 하고 있다. 

한국과 비슷하게 냉전의 대결장이 되어 분단을 경험한 독일에서도 한반도 소식은 화제를 모았다. 냉전 체제 극복을 넘어 재통일까지 이룩한 독일인에게 한반도의 이 같은 변화는 다른 어떤 나라 사람에게서보다 의미하는 바가 클 것이다. 취재진이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를 만난 이유다. 

정 대사는 독일을 잘 아는 인물이다. 1954년생인 그는 1979년, 청년기에 서독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올해 1월 2일에는 주독 한국대사로서 통일 독일을 찾았다. 독일의 분단과 재통일 체제를 모두 경험한 셈이다. '장벽 너머 사람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다. 

그간 취재진은 크게 재통일 당시 독일의 기성세대, 그리고 지금은 장년이 된 재통일 당시의 청년세대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집중했다. 정 대사와는 한국인의 시각으로 본 독일 재통일을 이야기하고, 현재의 한반도 변화를 바라보는 독일인의 시각을 관찰자의 눈으로 재정리하는데 집중했다.  

인터뷰에서 정 대사는 독일 정치권에서 최근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언급했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동아시아의 등대"라는 상찬도 나왔다고 전했다.  

정 대사는 다만 구 동독 지역이 여전히 과거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했다며, 독일의 급박했던 재통일을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독일의 재통일 과정과 당시 상황이 한국과는 여러모로 다르지만, 여기서 우리가 참고할 건 참고해 북한과 공존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정 대사는 지난 3일에는 베를린의 베를린자유대 한국학연구소 이전식에 참석해 박남영 북한대사와 포옹하는 모습을 남기기도 했다. 정 대사는 대사 부임 후 박 북한대사를 세 차례 만났다.  

지난 달 13일 베를린 한국대사관에서 실시한 정 대사와의 인터뷰를 정리했다. 

▲ 정범구 주독 한국대사. 그는 분단 시절 서독에서 유학했고, 지금은 통일 독일에서 생활한다. 독일의 분단과 그 극복기를 생생히 지켜보고 있다. ⓒ특별취재팀


독일이 한반도에 관심 갖는 이유는? 

프레시안 : 주독대사로 부임하신 지 약 8개월여가 지났다. 그동안 한국에서 남북 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분단을 극복한 국가인 독일에서도 한국 문제에 관심이 있을 것 같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독일 현지의 관심 수준이 어느 정도였나? 그저 단순한 외신 한 꼭지 이상의 의미가 있었나? 

정범구 : 독일이 아무래도 한국 상황을 특별히 바라보는 분위기가 있다. 우리처럼 분단 체제였다가, 이를 극복한 국가니까. 제가 만나는 독일사람 중 여럿이 한국 상황에 마음이 쓰인다고 한다.  

'단순 외신 수준'의 관심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난 4.27 판문점 선언 당시 독일 언론은, 많게는 신문 3개 면을 이 소식을 전달하는 데 사용했다.  

특히 옛 동독 시절 고위 인사들을 만나보면 특별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 시각에 따르면 동독 입장에서 독일 재통일은 '통일을 당한 경험'이다. (남북 힘의 격차가 있는) 우리 상황과 비교해서 생각하게 된다.  

프레시안 : 독일 언론의 관심이 예상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주로 어떤 시각으로 한반도 변화를 바라보나? 

정범구 : 우선 놀라움이다. 지난해만 해도 한반도는 핵 위기 상태였는데 한해 만에 급반전이 일어났으니까. 이곳에서 동아시아는 (아랍 지역과 마찬가지로) 분쟁 지역의 하나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강대 강으로, 전면으로 맞부딪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 우려가 컸다. 당시 메르켈 총리가 "한반도에서 무력 사용은 안 된다"는 입장을 바로 내고, 독일이 한반도 문제에서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기꺼이 맡겠다는 의사를 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올해 들어 달라졌으니 아주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프레시안 : 한반도 안정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이해되는데, 북핵 문제 해결에 포커스를 맞춘 미국, 일본과는 시각이 달라 보인다.  

정범구 : 그렇다. 독일은 남북한 동시 수교 국가다. 일방적으로 미국식 입장을 고수하진 않는다. 기본적으로 독일의 입장은 한반도 문제를 전쟁으로 풀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한국은 동아시아의 등대" 

프레시안 : 대사 업무를 수행하면서 여러 독일 정치인도 만나보셨을 텐데,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특별히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었나? 

정범구 : 지난 3월 27일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연방 하원의장을 만났는데, 이분이 예상보다 한반도 문제에 아주 큰 관심을 보였다. 우선 이 분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1972년부터 정치인 생활을 시작해서 지금도 활동하는 유일한 현역 정치인이다. 46년 내내 지역구 의원 생활을 했다. 제가 유학생이던 서독 시절에도 정치인이었던 분이다. 

이분과 당초 20분간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었는데, 이분의 관심이 워낙 커서 40분간 한반도 문제를 이야기했다. 당시 이 분이 저에게 한국의 변화, 한반도 정세의 변화 등과 관련해 "한국은 동아시아의 등대"라고 했다. 인상적 표현이었다. 비록 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의 이야기지만, 당시 이미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전환의 계기가 마련되었을 때다. 

한국을 이처럼 높이 평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한국이 빠른 산업화에 성공해 세계 10대 경제 강국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점. 둘째, 동시에 한국이 모범적으로 민주화 이행에도 성공했다는 점. 세 번째로 얼마 전까지도 전쟁 위협이 고조된 지역(한반도)에서 주도적으로 극적인 평화의 모멘텀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도 한국의 다이나믹한 변화를 인상 깊게 보고 있다다.  

프레시안 : 아무래도 독일이 분단, 급격한 발전 등 한국과 현대사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이 같은 반응이 나온 듯하다.  

정범구 : 그렇다. 다만 상찬의 포인트가 우리 일반 국민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다. 

보통 한국 기성세대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이제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물론 이것도 놀라운 성과지만, 독일은 한국이 민주주의적 가치를 체화한 나라라는 점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극단적으로 말해, 독일은 상대국을 민주주의 국가냐 아니냐는 점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독일이 대외관계를 설정할 때 상대국에 관한 최상의 표현은 '가치 공동체'다. 이 '가치'에는 '민주주의적 가치', '다원주의적 가치', '자유무역에의 신봉' 등이 포함된다. 이 가치를 모두 만족하는 나라가 세계에 그리 많지 않다. 유럽연합(EU) 소속국과 기타 G7 국가를 포함해 한국 정도다. 이 점을 고려하면, 독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국을 더 높이 평가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 자신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국제 문제에 책임을 가져야 할 일원이라는 거다. 

▲ 프로이센 왕국이 세워 지금은 베를린의 랜드마크가 된 브란덴부르크 문. 냉전 시기에는 베를린 장벽 8개 검문소 중 하나로 쓰인 탓에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었다. 이제는 독일 재통일의 상징이 되었다. 남북한으로 비교하자면, 판문점과 같은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특별취재팀


독일서 배울 것: 준비 없는 통일은 재앙 

프레시안 : 동서독 분단 시기 서독으로 유학을 떠나 상당 기간에 걸쳐 동서독 변화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통일 독일과 당시를 비교하면, 특별히 눈에 보이는 차이점이 있나?

정범구 : 난 1979년에 서독으로 나왔다. 공부를 끝내고 귀국한 때는 재통일 시기인 1990년이다. 아무래도 당시와 비교하면, 이제 통일이 확실히 사회에 녹아들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동서 베를린 간 자유 통행이 가능해졌다. 당시 저도 서독 브라운 슈바이크에서 국도를 통해 동쪽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당시 내가 처음 떠올린 생각이 지금도 선명한데, 20세기에서 18세기로 돌아온 듯했다. 

동독의 실체를 보기 전만 해도 나에게 동독은 동구권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다. 내가 동독에서 약 60㎞ 떨어진 지역에서 공부했기에, 동독TV 전파가 잡히곤 했다. 당시 동독TV를 보면 서독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여름에 휴가들을 잘 다니고, 트라비라는 차량은 전 인민이 한 대씩 갖고 있고...  

하지만 막상 실체를 보니 현실이 달랐다. 특히 도로 상태는 아주 안 좋았다. 도로 곳곳이 깨진 상태라 시속 30㎞를 내기도 어려웠다. 집들도 외관상으로만 보면 벽이 멀쩡한 건물이 거의 없었다.  

그때의 기억이 인상에 남은 이유가 있다. 우리는 아직도 북한을 쉽게 방문하지 못하잖나. 당시 나는 '북한도 이럴까' 하는 생각을 하며 동독 지역을 돌아봤다. 

1989년 독일 재통일 당시 자료를 보면, 대략 동독은 서독의 33% 수준 국가였다. 그랬는데도 외관상으로는 그처럼 엄청난 격차가 보였다. 그런데 현재 남북 상황은 어떤가? 2017년 한국은행 통계를 보면, 남북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격차가 47대 1이다. 동서 격차보다 훨씬 크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급격한 통일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만일 어떤 변수에 의해 북한 체제가 붕괴해 남한이 북한을 흡수하는 상황이 온다면, 남한에도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다. 

프레시안 : 실제 옛 동독은 서방 홍보용으로 인민이 자유롭게 산다는 점을 강조하곤 했다고 들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전시장 국가였으니, 인민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줬고 인민을 위해 청바지를 생산하기도 했다. 강력한 통제가 지금도 작동하는 북한과는 상황이 조금 달랐던 듯하다.  

정범구 : 동독도 기본적으로 경찰국가였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다른 통제 사회에 비해서는 자유가 조금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동독만 해도 사회주의 독재 이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민주 공화국을 경험했다. 북한과 역사 배경이 다르다. 

프레시안 : 그처럼 기본적 경험이 있었음에도, 재통일 후 동서 격차가 엄청났다. 그 때문에 지금도 독일은 통일 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3일 베를린에서 열린 독일 재통일 28주년 기념행사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 통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재통일 28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당면한 도전 과제"라며 "통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완성까지는 머나먼 길을 걸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정범구 : 아무래도 구 동독 지역에서는 통일 이후를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동독이 무너질 당시 마지막 집권자가 한스 모드로 전 총리다. 올해 나이가 90세다. 이분을 얼마 전에 만났는데, 한 서류를 보여주시더라. 동독이 나름대로 만든 통일 플랜이었다. 하지만 이미 당시 통일 주도권은 서독이 쥔 상태였고, 결국 서독 주도로 흡수 통일이 완성됐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자면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다. 당시 헬무트 콜이 동서독 마르크화를 통합하면서 특히 큰 비판이 일었는데, 그처럼 급박한 조치가 없었다면 독일 재통일이 더 더뎠고 힘들었으리라는 생각 말이다.  

▲ 동독 정부가 청바지에 열광하는 인민을 위해 생산한 청바지 '복서.' 동독 정부는 청바지를 입은 동독 연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롭게 거리를 달리는 모습, 가족이 여유롭게 휴가를 즐기는 모습 등을 홍보영상으로 만들어 서방에 홍보했다. 복서 바로 곁에 당시 동독 젊은이의 꿈이었던 리바이스 청바지가 걸린 모습이 인상 깊다. 베를린 DDR박물관 전시. ⓒ특별취재팀


김정은 위원장이 변해야 북한도 변한다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 과정을 어떻게 평가하나? 

정범구 : 내부의 노력과 국제 상황이 잘 맞아떨어졌다.  

독일 내부적으로 보자면,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펴면서 냉전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 때 동독에서도 라이프치히 시민을 중심으로 체제 항쟁이 이어져 통일의 전기가 마련됐다. 때맞춰 고르바초프가 개혁 개방으로 대표되는 변화를 이끌면서 통일이 가능했다. 기실 고르바초프가 아니었다면 동서독의 재통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1989년~1990년의 사태 전개 상황이 궁극적으로 통일을 바라보는 우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베를린 장벽이 1989년 무너졌지만, 당시 서독 정치인들은 독일이 통일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동서독은 여전히 미영불소 4개국 합의 하에 관리되던 나라였기 때문이다. 즉, 이니셔티브는 저들 강대국에 있다고들 보았다. 실제 영국의 대처는 강경하게 독일 재통일을 반대했다.  

이 상황에서 소련이 변화하고, 이에 맞춰 독일 정치인들이 역할을 분담해 미국의 통일 협조를 이끌어내면서 국제 여론을 통일 찬성 분위기로 바꿨다.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을 남북관계에 비유하자면, 한반도 변화에도 국제 여론이 매우 중요하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꾸준히 북한은 물론, 미국과 EU 등을 설득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반면, 분명히 당시와 지금의 다른 점도 있을 듯하다. 특별히 다른 점이 무엇일까?

정범구 : 아무래도 북한과 동독 사회의 차이점이 눈에 보인다. 동독만 해도 슈타지가 엄청난 힘을 지닌 경찰국가였다. 슈타지 요원만 9만 명에, 비공식 협력자(IM)는 18만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동독의 경찰 체제는 기본적 인권을 어느 정도는 지키려했다. 예를 들어 정치범도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비록 동구권으로 한정되긴 했지만, 인민의 여행도 보장됐다. 특히 기독교 문화는 동독도 통제하지 못했다. 이런 최소한의 기반이 있었기에 동독 체제 말이 되자 반독재 시민 투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즉, 내부의 변화 움직임이 생길 수 있었다. 

반면, 북한은 아무래도 이런 자생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체제는 아니다. 따라서, 결국 북한이 변화하려면 최고 권력자의 결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즉,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제가 독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김정은 위원장이 정말 비핵화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본다고 대답한다. 이제 북한도 더는 사회주의적 구호, 선전만으로 체제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김 위원장이 젊다는 게 중요하다. 그는 외국 유학 경험이 있다. 핵만으로는 체제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안다. 인민의 실질적인 생활 수준 개선을 이뤄내야만 체제가 안정될 수 있음을 안다고 본다. 핵만 내주면 경제를 살려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는데, 왜 안 하겠는가.

이런 관점으로 북한을 바라보니, 북한의 관료주의 체제가 강하다는 점도 눈에 들어오더라. 관료 체제에서 최고지도자 혼자 혁신적 생각을 한다고 변화가 쉽게 일어나나? 그렇지 않다. 아무리 최고지도자라도 나라 구석구석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다. 즉, 북한이 실질적으로 변화하려면 중간 관료들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런 기득권층이 약 3만 명 정도 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면서 체제를 바꾸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당장 우리 사회에서도 촛불 이후 대통령이 바뀌었는데 왜 현실이 변하는 게 없느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크잖나? 북한은 오죽하겠나? 김 위원장이 변화의 말을 한 마디 해도, 그 이행 과정을 누군가 확인하지 않는다면 변화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김 위원장이 현장 지도에서 화를 많이 낸다는 데, 그래서가 아닐까 싶다. 자신이 말할 때 눈앞의 간부들은 고개를 숙이지만, 정작 현장에 와 보면 제대로 변화되지 않겠지. 북한의 변화에는 대외적 문제는 물론, 이처럼 바깥의 우리는 알기 어려운 내부적 사정도 극복해야 한다는 숙제가 있다. 

▲ 남북관계 변화는 한두 사람만의 노력으로 이뤄질 수 없다. 남북 두 정상과 함께 주변 국의 변화, 관료의 변화도 함께 이행되어야만 한다. ⓒ판문점 공동취재단


통일에의 의지 계속 이어져야 

프레시안 : 많은 사람이 '남북 관계는 동서독 관계와 너무 달라 한국이 독일로부터 배울 건 없다'고들 한다. 동의하나? 

정범구 :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물론 동독과 북한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분단 체제를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갔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나. 특히 한국은 독일로부터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배울 수 있다고 본다.  

우선 빌리 브란트 정부의 대 동독 원칙이다. 접근을 통한 변화, 즉 가까이 다가가서 변화를 이뤄내겠다는 것이다.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끝없이 동독과 접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빌리 브란트의 보좌역으로 전 서독 경제협력부 장관이자 ‘독일 재통일의 설계사’로 불린 에곤 바르의 말이다. 이 기조를 서독 정부가 계속 유지했다. 서독 사람들은 동독의 친지를 언제든 만날 수 있도록 했고, 이를 위해 서독 정부가 동독으로 가는 시민을 금전적으로 지원했다. 함부르크와 베를린 간 고속도로도 서독 정부가 깔았다. 당장은 돈이 나가는 것 같지만, 그만큼 동서독 접촉 면이 넓어진다는 이유였다. 이 같은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배울 건 통일에의 의지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재통일 기념일마다 통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이 같은 우려에 관해 브란트가 한 말이 있다. "같은 뿌리에서 자란 나무는 결국 함께 성장하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앞서 보았듯 남북의 격차는 동서독 격차보다 크다. 우리가 무리하게 통일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다만, 통일에의 전망과 비전은 꾸준히 갖고 가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우리가 동서독 통일로부터 받아들일 교훈이라고 본다.  

동독, 북한, 그리고 민주주의  

프레시안 : 언급한대로, 여전히 독일 통일이 완수되지 않았다는 독일 내 평가가 많다. 동서 격차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범구 대사는 독일의 급박했던 통일로부터 좋았던 점과 잘못된 점 모두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정범구 : 물론 경제적 격차 문제는 중요하다. 눈에 보이는 장벽은 무너졌지만, 동서 독일인 마음 속 장벽은 더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이 실제 독일에서 있다. 아직 구 동독 출신이 2류 취급을 받는 부분이 있다. 

지금 구 동독 지역에서 심각한 문제가 인구 유출이다. 상당수 지역이 농촌 지역인데, 특히 여성 노동 인력이 서쪽으로 빠져나가면서 경제적, 문화적 소외 요소가 크다. 

구 동독 내 세대 간 갈등 요소도 있다. 지금 구 동독 노령 세대는 동독을 건설한 세대다. 이들은 사회주의 체제가 발전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풍부한 복지 혜택을 누렸다. 그런데 재통일 이후, 이런 이야기는 이제 공공연하게 하기 힘들게 됐다. 구 동독의 모든 게 잘못됐다는 인식이 강해졌으니까. 이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다음 세대는 통일의 희생양이다. 장벽이 무너질 때 장년이어서, 급격한 체제 변화를 온몸으로 떠안은 세대다. 이들이 가장 불운하다.  

통일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는 부모, 조부모와 전혀 다른 세대다. 서독 출신처럼 당당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통일 독일의 세대다. 이처럼 세 새대의 경험이 극단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동독 내부적으로도 갈등 요인이 있다. 이런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결합해 지금 구 동독 지역의 극우화가 진행됐다고 볼 수 있다.  

프레시안 : 동독 지역의 극우화는 우리도 눈여겨봐야 할 지점인 듯하다. 당장 한국에 안착한 적잖은 탈북민이 북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걸 미디어가 자주 보도한다. 

정범구 : 동독의 경우를 말하자면, 구 동독인의 민주주의 훈련 여부도 극우화에 중요한 변수가 된다고 본다. 아무래도 서독 출신에 비해 구 동독 기성세대는 민주주의 교육에서 취약한 면이 있었다.  

남북관계에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아직 통일을 이야기하기엔 이르지만, 통일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지역에 민주주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아무래도 체제의 특성상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보다 수직적 관계, 복종에 더 익숙하다. 만일 지금 이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통일이 온다면, 북한이 (동독처럼) 극우의 전진기지가 될 수 있다.  

물론 서독 사람이 동독 사람을 이해해야 하듯, 남한 사람도 북한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서독 사람들이 흔히 동독 출신을 비하하며 하는 말이 자기표현을 못 한다, 타자를 관용하지 않는다, 게으르다는 얘기다. 그런데, 사교성은 자본주의적 습성이다. 자신을 상품화해야 하니 평판에도 민감하고, 좋은 관계에 목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굳이 사교적이려 노력할 이유가 없다. 이런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프레시안 : 독일 재통일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두 체제의 생활 수준 격차를 좁히기 위해 우리가 독일로부터 배워야할 게 있을까?

정범구 : 부임 후 상황을 보자면, 독일은 여전히 동서 간 심리적 통합을 위한 노력보다 과거 동독 체제 청산에 더 힘을 쏟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슈타지 활동가에 관한 아카이브화 작업을 하거나,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 하에서 동독인들이 얼마나 비민주적 취급을 받았는지 등을 들여다보는데 집중한다. 이런 노력이 필요하지만, 심리적 통합을 위해서도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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