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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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부활대축일: 낮 미사: 저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 / 조욱현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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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모 [kanghmo7] 쪽지 캡슐

2017-04-16 ㅣ No.111492

 

예수부활대축일: 낮 미사: 저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

 

부활절은 축제 중의 축제로서 그 의미가 참으로 넓고 깊어서 오늘의 전례를 통해 이해하기란 어렵다. 어제 밤에 지낸 부활성야의 빛의 예식과 장엄한 부활선포에서 시작하여 여러 가지 고찰을 할 수 있겠지만 부활 메시지를 종합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신앙의 증거가 되고 우리의 생명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낮 미사의 독서와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1독서: 사도 10,34a. 37-43: 베드로의 부활하신 예수께 대한 설교

 

베드로는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 집에서 예수님의 공생활, 즉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의 죽음,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39-42).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체험한 것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 대한 체험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했다는 것은 그들이 파스카 사건에 대한 회의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당신의 권능과 충실성을 드러내신 하느님께 또한 성실성과 순명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부활은 당신의 인성이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함을 의미하며, 그 결과 이제는 그분의 몸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8)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을 내치실 수가 없으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주님의 부활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충실성의 행위로서 받아들이면 된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43).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1), 오늘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당신의 탄생으로 인간의 탄생을 거룩하게 하신 분이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 날, 부활하신 분과 함께 낙원이 열린다. 그 낙원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 그곳에 분명히 주님께서 묻히셨는데,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마리아는 시신이 없자 누가 훔쳐갔다고 생각한다. 마리아는 무덤에 왔을 때, 아직 어둠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셨지만, 예수님께 대한 존경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있음을 보인다. 살아계실 때처럼 똑같이 주님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을 살핀다.

 

그들이 무덤으로 달려가 본 때는 환할 때였다. 그들은 어둔 밤에 와서 그분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수석 사제들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아무도 믿지 않게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밤이나 아직 어두울 때가 아니라 환할 때 왔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무서워 한 집에 모여 문을 걸어 닫고 있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용감하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부리나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 그것이 부활의 표지이었다. 누가 시신을 훔쳐갔다면, 시신과 함께 아마포까지 다 들고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몰약을 바르면 아마포가 납처럼 시신에 달라붙지 않는다.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이 아마포와 따로 잘 개켜져 놓여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분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갔다고 하는 사람들 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blepein,1), 베드로의 경우처럼(theorein,6)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즉 피상적인 차원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oran)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감화되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동화시킴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 등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으로 하여금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심은 후에 나타난다(20,19-29)-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보다 깊이 보고’ ‘믿게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에 의해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D. Mollat, La foi pascale selon le chapitre 20 de l'Evangile de Jean, in Resurrexit, Libreria Ed., Vaticana, Roma 1972, pp. 316-332).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 구체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지, 빈 무덤이나 잘 개켜진 수건과 같은 어떤 구실이나 단서를 찾는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9).

 

2독서: 골로 3,1-4: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시어(루가 24,34) 하느님의 영광중에 살아 계신다면, 이제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분과 친교를 나눌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살 수 있게 된다. 그분은 이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우리 인간들에게 내어주시기 때문이다. 부활의 은총으로 새로이 창조된 새로운 창조물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을 갈망하면서 부활을 숨 쉬며 살아야 한다.

 

부활을 숨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삶이 매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 체험 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1-2).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저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우리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형제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었던 한없는 사랑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 사랑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삶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상의 삶을 이미 이 땅에 끌어내려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삶은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부활한 후의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연습, 아니 죽어야 한다.

 

죽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한 말과 같이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선포이, 그리스도, 즉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참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도다.”라고 찬미드릴 수 있어야 하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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