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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은 실제 모습을 부풀려 보여준다 - 윤경재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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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whatayun] 쪽지 캡슐

2017-02-14 ㅣ No.110077


 

누룩은 실제 모습을 부풀려 보여준다

 

- 윤경재 요셉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4,15)

 

유대인들은 니산 달 14일에 과월절을 지냅니다. 과월절에는 온가족이 모여 파스카 양을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그날에는 묵은 누룩을 치우려고 온 집안을 이 잡듯 샅샅이 청소합니다. 그 청소장면을 목격한 교민들 말에 따르면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다고 합니다. 집안 청소하는 광경은 우리나라에서 이삿짐을 싸는 것보다 심하다고 합니다. 부엌살림은 물론 집안 가구들과 장식품들도 모조리 들어 옮겨 털어내고 문틀과 창문틀까지 가는 붓 솔로 정성껏 털어낸다고 합니다. 한 톨이라도 묵은 누룩이 남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북새통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날부터 1주일간 무교절을 지냅니다. 무교절은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과자 같은 빵으로 식사하는 것으로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 하던 옛 조상들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탈출한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뜻이 담겼습니다. 이런 행동은 이집트 땅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고, 바쁘게 도망 나와야 했던 절박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정작 광야에서 먹을 것, 마실 것이 떨어지자 이집트 땅에서 먹었던 빵과 고기 맛을 떠올리며 모세와 하느님께 반항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이집트의 누룩을 완전히 치워 버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누룩은 밀가루 속에 조금만 들어가도 발효를 일으켜 반죽이 부풀게 합니다. 부푼 반죽으로 빵을 만들면 부피도 커지고 식감도 부드러워 입맛에 맞게 됩니다. 그래서 누룩은 성경에서 두 가지 의미를 상징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1333절에서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라는 것처럼 하늘 나라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또 마태오 복음서 1612그제야 그들은 빵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처럼 부패와 연결시켜 악이 번져 나가는 악의 상징으로 보기도 합니다. 같은 누룩이라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하늘과 땅의 차이가 생긴다는 걸 보여줍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이해하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 표징을 통해 자기들이 바랐던 종교적 열망이 옳았으며 예수를 자기네 패거리에 흡수하여 한몫 보려는 심사가 담겼습니다.

 

헤로데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었어도 이민족인 로마 권력과 작당하여 유다 통치권을 획득하고 온갖 권모술수로 자신들 가문의 영광을 위해 힘쓴 자였습니다.

 

모든 남자들 가슴 위에는 어떤 배지가 달렸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충성을 나타내는 상징물을 획득하고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인생을 건다고 합니다. 바리사이들에게 그 배지는 종교적 우월감이었으며, 헤로데에게는 무소불위의 힘이었습니다. 헤로데를 지배하는 주인은 권력을 향한 자신의 채울 수 없는 욕망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남자들 가슴 위에도 각자 추구하는 배지가 달려 있습니다. 제자들의 가슴 위에도 배지를 달고 싶다는 열망이 남아 있었습니다. 자기들만의 메시아를 찾겠다는 메시아 열망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열망을 제대로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릇된 방향으로 변할까 염려하시고 미리 바로잡고 싶으셨습니다. 누룩의 비유가 하늘을 향할 수도 있고 땅으로 추락하게도 하듯이 말입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메시아의 모습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결코 쉽게 이해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메시아라고 이르지 않으시고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란 이름으로 부르셨습니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특별한 명칭입니다. 구약에서도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란 이름을 쓴 경우가 없었습니다.

 

구약에서 사람의 아들이란 용어는 다니엘 예언서 7,13에 나옵니다.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다니엘서의 의미는 하느님의 나라를 다스릴 권한을 받으실 분이라는 뜻이 담겼습니다.

 

또 에제키엘 예언서에서는 주님께서 에제키엘을 예언자로 부르시면서 계속 사람의 아들이라 호칭하십니다. 여기서는 에제키엘이 한낱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에두른 표현이었는데, 나중에 예언자를 가리키는 용어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에서는 오직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만 사람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나오고 그 누구도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습니다. 그 사용용례를 보면 첫째, 예수님이 지상 활동과 관련지어 당신을 지칭하실 때(마태11,19; 루카7,34). 둘째, 수난과 죽음 및 부활 예고 대목에서(마태17,22; 마르8,31 ). 셋째, 종말에 이루어질 재림을 언급하실 때(마르14,62; 요한5,27) 등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히브리 말로 하면  ‘벤 아담’입니다. 아담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창세기 1장26절에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여기서 비슷하게모습으로 번역된 두 히브리어 단어는 데무트셀렘인데 셀렘은 본질이나 속성이 닮았다는 뜻이고, 데무트는 틀로 찍어 내듯 겉모양이 닮았다는 뜻입니다. 즉 범죄하기 전의 아담은 하느님의 본질과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겉모습도 비슷하게 창조되었다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는 신구약을 통털어 스스로  ‘벤 아담’이라고 부르신 유일하신 분입니다. 이는 당신 안에 하느님의 본질과 속성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예언자나 메시아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포함하여 바리사이와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아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시고자 원하셨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신 예수님 모습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해한 채 자신들이 만든 허상을 가슴속에 품고 산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마치 누룩을 뿌린 밀가루 반죽처럼 계속 허황되게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 제자들이 예수님의 진의를 깨닫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바리사이나 헤로데와 같은 착각에 빠지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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